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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판 농가월령가 또는 달타령

중앙선데이 2018.01.07 02:00 565호 25면 지면보기
미하일 플레트네프가 연주한 차이콥스키의 ‘사계’ 음반. 버진레코드 녹음이다.

미하일 플레트네프가 연주한 차이콥스키의 ‘사계’ 음반. 버진레코드 녹음이다.

어린 시절 동네 형들과 칡을 캐러 다니던 언덕 위에는 붉은 벽돌집이 있었다. 눈 내린 다음 날 그 집 앞을 지나는 건 환상적인 일이었다. 주변의 커다란 나무들과 뾰족한 지붕이 흰 눈 속에 묻혀 있었다. 겨울 햇살이 처마 끝의 고드름에 닿으면 똑똑똑 일정한 간격으로 낙숫물이 떨어졌다. 

WITH 樂: 차이콥스키 ‘사계’

 
나와 친구들은 철조망 사이로 그 집을 훔쳐보았다. 달력에서 보던 이국적 풍경에 마음을 빼앗겼다. 하지만 그 집은 늘 문이 닫혀 있었고 드나드는 흔적도 없었다. 아이들은 그 집을 둘러싸고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소설 『소나기』의 여주인공처럼 아픈 여자 아이가 산다는 이야기, 사형수가 감형을 받고 숨어 산다는 이야기, 부잣집의 별장이라는 이야기. 하지만 무엇이 사실이었는지는 지금까지 알 수 없다. 
 
한 해가 시작되었다. 상상력이 빈곤해지는 아파트에서 차이콥스키의 ‘사계’를 듣는다. 이 곡은 차이콥스키의 농가월령가요 달타령이다. 물론 피아노로 연주하는 무언가(無言歌)다. 비발디나 피아졸라처럼 1년을 사계절로 나눈 것이 아니라 열두달로 나누어 묘사한 러시아 시를 바탕으로 만든 곡이다. 민요적인 요소는 물론이고 러시아의 정서가 많이 배어 있다. 차이콥스키는 이 곡을 직관적으로 만들었다. 듣는 입장에서도 부담 없이 접근 할 수 있다.
 
1월의 부제는 ‘화롯가에서’다. 난로에는 이야기가 숨어 산다. 어린 시절 집안에 있는 난로 위에는 귤껍질을 올려 놓거나, 고구마를 구웠다. 밖에서 들어왔을 때 끓고 있던 보리차는 얼마나 따뜻하고 구수했던가. 문득 아내에게 석유 난로 하나 사자고 제안했다가 핀잔을 들었다. 냄새도 많이 나고 불편하다는 것이다. 2월은 ‘카니발’을 준비하는 사람들의 살짝 흥분되고 분주한 발걸음이 떠오른다. 카니발이 없는 우리로서는 상상하기 어렵지만 설날 상인들의 흥정하는 목소리나 짐을 나르는 바쁜 발걸음 정도를 생각한다. 
 
4월의 부제는 ‘설강화’(snowdrop)다. 이른 봄에 피는 수선화과의 갈란투스라는 꽃이다. 얼음 속의 꽃처럼 새초롬하면서 낭만적인 곡이다. 5월의 제목은 ‘백야’다. 러시아의 백야가 5월에 시작되기 때문이다. 아르페지오 선율 사이로 눈빛을 나누는 연인들의 설렘이 전해진다. 6월 ‘뱃노래’는 가장 유명한 곡이다. 나른하지만 애상적인 선율이 아름답다. 물 위를 미끄러지듯 흘러가는 배, 물 아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는 여인의 눈빛, 배가 지나간 자리에 떨어지는 물방울 소리가 들린다. 7월은 빠른 템포의 곡이다. 제목이 ‘추수꾼의 노래’로 되어 있는데 러시아에서는 7월에 무얼 추수하는지 모르겠지만 분주히 일하는 농민들의 모습들이 보인다. 이어지는 8월 역시 같은 분위기다. 
 
10월은 말 그대로 ‘가을노래’다. 톨스토이는 러시아의 가을을 이렇게 표현했다고 한다. “가을, 우리의 아련한 뜰은 초라해져가고 노랗게 물든 나뭇잎이 바람에 날려가네”. 첫 화성에서 6도 올랐다가 하행하는 음형부터 가을의 낙엽이 하나둘씩 떨어진다. 멜로디가 반복될수록 가을 숲 안으로 천천히 걸어 들어가는 나를 발견한다. 11월은 러시아 마차인 ‘트로이카’다. 귀에 익숙한 멜로디 덕에 설원을 달리는 마차가 외롭지 않다. 
 
차이콥스키의 ‘사계’는 주로 미하일 플레트네프의 연주를 듣는다. 음반은 두 종류가 있다. 하나는 80년대 중반 멜로디아 레이블에서 녹음한 것이다. 지휘자로 데뷔하기 이전의 젊은 플레트네프를 만날 수 있다. 상대적으로 구하기 쉬운 건 90년대 중반 버진 레이블에서 녹음한 음반이다. 
 
새로운 한 해가 시작되었다. 세월이 갈수록 느는 건 체중이요 줄어드는 건 상상력이다. 새해 목표를 이리 정했다. “몸은 날렵하게 상상력은 풍부하게.”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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