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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마 원정서 일본군 대대 섬멸 … 국제적 명성 얻은 쑨리런

중앙선데이 2018.01.07 01:46 565호 28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62>
국공전쟁 초기 동북을 시찰, 방어시설 둘러보는 쑨리런(앞줄 왼쪽 둘째). 1947년 봄, 창춘(長春).

국공전쟁 초기 동북을 시찰, 방어시설 둘러보는 쑨리런(앞줄 왼쪽 둘째). 1947년 봄, 창춘(長春).

전쟁은 정상적인 사람들의 놀음이 아니다. 평소라면 생각지도 못할 일들이 벌어진다. 신망받던 대전략가들이 하루아침에 조롱거리가 되는가 하면, 어느 구석에 있는지 보이지도 않던 사람들이 국민적 영웅으로 떠오르곤 한다. 쑨리런(孫立人·손립인)도 널리 알려진 군인은 아니었다. 버마(지금의 미얀마) 원정군 1개 사단을 지휘하면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었다.

영, 일본군이 버마 넘보자 지원 요청
국방부장 “전쟁터에 나갈 생각 있나”
쑨리런 “전쟁은 천직” 38사단 지휘

영국군 7000명 구해 제국훈장 받아
내전선 린뱌오의 야전군 깔아뭉개
장제스, 능력 인정했지만 신임 안 해

 
1930년 봄, 장제스(蔣介石·장개석)는 처남 쑹즈원(宋子文·송자문)에게 재정부를 맡겼다. 신신당부했다. “소금 밀매를 철저히 단속하고 세금 징수를 엄격히 해라.” 쑹즈원은 재정부 산하에 세경총단(稅警總團)을 출범시켰다. 구성원은 군인이었다. 군대나 다름없었다.
 
어릴 때부터 미국교육 받은 쑹즈원은 지휘관 물색에 애를 먹었다. 황푸군관학교 출신들은 성에 차지 않았다. 6개월간 군사교육 받고, 임관 6개월 만에 장군 계급장 단 지휘관들이 수두룩했다. 미국 명문대학과 일류 군사학교 졸업한 쑨리런을 세경총단 특과 단장에 임명했다. 쑨리런은 임무 수행에 빈틈이 없었다.
 
중일전쟁이 발발했다. 쑨리런은 세경총단 이끌고 상하이전투에서 선봉에 섰다. 온몸에 부상 입고도 살아남았다. 홍콩에서 치료 중인 쑨리런에게 기자들이 몰려왔다. 중국에 이런 군인이 있다며 연일 쑨리런의 얼굴을 신문 1면에 실었다. 홍콩에서 돌아온 쑨리런은 세경총단이 정규군에 편입된 것을 알았다. 부하들 인솔해 시안(西安)에 주둔했다. 시안은 전투 지역이 아니었다. 징병과 신병 훈련에 땀을 흘렸다. 효과가 있었다.
 
원정군 시절 폐허가 된 불교 사원 을 방문, 불상 앞에 선 쑨리런. 1945년 1월 17일 버마(지금의 미얀마). [사진 김명호]

원정군 시절 폐허가 된 불교 사원 을 방문, 불상 앞에 선 쑨리런. 1945년 1월 17일 버마(지금의 미얀마). [사진 김명호]

1942년 초, 필리핀·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싱가포르를 석권한 일본군이 버마를 넘봤다. 양곤이 위기에 처하자 영국이 중국에 지원을 청했다. 당시 버마는 중국이 외부로부터 군수물자를 보급받을 수 있는 유일한 통로였다. 원정군 파견을 결정했다.
 
국방부장이 쑨리런을 불렀다. “네가 쑨리런이냐?” “맞다.” “세경총단이 전쟁에 참여한 적이 있느냐?” 쑨리런은 자존심이 상했다. 상하이전투 상황을 상세히 설명했다. 국방부장은 고개를 끄덕였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전쟁터에 나갈 생각이 있느냐?” 쑨리런은 기다렸던 질문에 흥분을 가누지 못했다. “고대한 지 오랩니다. 기회가 없었습니다. 전쟁은 저와 부하들의 천직입니다.” 국방부장은 흡족했다. “좋다. 원정군 파견에 합류시키겠다. 새로 편성된 38사단을 지휘해라.”
 
쑨리런에게 버마는 행운의 땅이었다. 일본군이 영국군 1개 사단을 포위했다. 쑨리런은 일본군 1개 대대를 섬멸시켰다. 영국군 7000명을 무사히 구해 냈다. 영국 왕 조지 6세로부터 제국훈장을 받았다. 외국 군인에게 수여한 첫 번째 훈장이었다. 해외 원정군 시절 쑨리런의 전공(戰功)을 따라올 사람이 없었다. 일본군을 가장 많이 때려잡은 중국 장군이라는 찬사를 귀에 달고 다녔다. 미국 군사가들이 “동방의 마샬”이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일본이 항복하자 중국은 내전에 돌입했다. 장제스는 쑨리런을 동북(東北)으로 파견했다. 쑨리런은 명장이었다. 쓰핑(四平)전투에서 전쟁귀신 린뱌오(林彪·임표)가 지휘하는 동북야전군을 깔아뭉갰다. 송화강 인근으로 몰아붙였다. 승리가 임박한 듯했다.
 
무슨 일이건 대형사고는 최고 지휘관이 치는 경우가 많다. 장제스가 사고를 쳤다. 장제스는 자신의 손으로 키워 낸 황푸군관학교 출신들을 총애했다. 1기생들에게는 거의 병적일 정도였다. 공을 세워 주기 위해 무리를 서슴지 않았다. 쑨리런이 승리할 기미가 보이자 지휘관을 1기생 두위밍(杜聿明·두율명,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랸전닝의 장인)으로 바꿔 버렸다. 두위밍은 사람은 좋았지만 린뱌오의 상대는 못 됐다. 중공에 포로가 되는 바람에 장제스를 실망시켰다.
장제스도 쑨리런의 공적과 능력을 인정했다. 신임하지는 않았다. 황푸군관학교 출신이 아니라는 것 외에는 다른 이유가 없었다. 수도 난징(南京)으로 소환당한 쑨리런에게 엉뚱한 보직을 줬다. “대만(臺灣)으로 가라. 신병 훈련에 전념해라.”
 
대만에 온 쑨리런은 모병에 열중했다. 쑨리런의 명성은 청년들에게 신화가 된 지 오래였다. 대륙에서 건너온 학생들이 줄을 이었다. 훈련은 실전 위주였다. 혹독할 정도였다. 국민당을 탐탁지 않게 여기던 미국도 쑨리런에게는 호감을 있는 대로 드러냈다.
 
장제스가 대만을 방문했다. 쑨리런의 신병훈련 성과에 만족했다. 대만 방위사령관까지 겸직시켰다. 쑨리런에게 훈련받은 신병들이 군인냄새를 물씬 풍길 때였다. 게다가 강병이었다. 2년 만에 30만으로 늘어났다.
 
대륙에서 패배한 국민당군이 대만으로 철수했다. 거리에 장군들이 넘쳤다. 소장 정도는 거처할 집도 변변치 않았다. 대만 전역에 실병력을 거느린 사람은 쑨리런 외에는 없었다. 신병훈련소가 실질적인 육군총사령부 역할을 했다. 황푸군관학교 출신이건 뭐건, 쑨리런의 눈치를 봤다. 대만 방위사령관까지 겸한 쑨리런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다.
 
미국은 장제스에게 실망했다. 대체할 인물을 찾았다. 쑨리런 외에는 대안이 없었다. 쑨리런의 비극은 이때부터 시작됐다.<계속>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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