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3~4시간 판소리 완창, 낡은 부채가 ‘커닝페이퍼’

중앙일보 2018.01.06 01:00 종합 17면 지면보기
안숙선 씨가 자신이 쓰던 부채를 보여주면서 귀퉁이에 적은 가사 컨닝 페이퍼를 보여주고 있다. [신인섭 기자]

안숙선 씨가 자신이 쓰던 부채를 보여주면서 귀퉁이에 적은 가사 컨닝 페이퍼를 보여주고 있다. [신인섭 기자]

판소리를 부르는 소리꾼은 뻣뻣이 서서 부르기보다는 극중 인물로 화해 연극적인 동작을 하게 마련이다. 이를 ‘너름새’라 한다. 조선 후기 판소리 이론가였던 신재효(1812~84)는 “너름새에는 구수한 맛이 깃들고, 아름답고 보기 좋은 모양새여야 한다”고 했다. 안숙선 명창의 너름새는 맵시 있고 기품 넘치기로 유명하다. 창과 창 사이에 이야기하듯이 하는 ‘아니리’도 완급을 조절하는 멋이 일품이란 평이다.
 
너름새와 아니리를 펼칠 때 긴요하게 쓰이는 물건이 부채(사진)다. 한 손에 부채를 쥐고 균형을 잡아가며 활용하면 소품 이상 가는 도구가 된다. 극적인 장면에서 좍 폈다가 긴장이 가라앉는 순간에 살포시 접으면 청중을 집중시키는 음향 효과까지 얻는다.
 
안숙선 명창이 1980년대부터 즐겨 썼던 부채는 여기에 더해 비밀 병기 구실까지 했다. 판소리는 평균 서너 시간을 외워 부른다. 안 명창은 국립극장 완창판소리 무대에 스물일곱 차례 선 최다 출연자다. ‘적벽가’ ‘수궁가’ ‘흥보가’ ‘춘향가’ ‘심청가’ 다섯 바탕을 완창 했으니 다 암기했더라도 가끔 혼동하는 어려운 부분이 있기 마련이다. 부채에 이 대목을 몇 글자로 표시해 놓았으니 이 낡은 부채는 안 명창의 커닝페이퍼였던 셈이다.
 
정재숙 문화전문기자 johanal@joongang.co.kr
관련기사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