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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현기의 시시각각] 위안부 합의 전날 밤의 한·일전

중앙일보 2018.01.03 01:43 종합 30면 지면보기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일본군 위안부 합의 전날인 2015년 12월 27일 심야 11시.
 

내용적 절차적 흠결 과연 중대했나
피해자중심 해결 묘안 과연 있는지

이병기 당시 청와대 비서실장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상대방은 야치 쇼타로 일본 국가안전보장회의 국장.
 
“급한 일이 생겼다. 합의안에 소녀상 철거를 반드시 넣어야겠다.”(야치)
 
“뭔 소리냐. 그럴 거면 내일 기시다 외상 오지 말라고 그래라.”(이병기 실장)
 
“그게 톱(박근혜 전 대통령)의 뜻이냐.”(야치)
 
“지금 시각 통화가 힘들지만…, 아마 내가 지금 하는 말보다 더 심한 이야기를 듣게 될 것이다. 전화 끊겠다.”(이병기)
 
30분 후 야치는 다시 이병기에게 전화를 돌렸다. “알았다. 그쪽 말대로 하겠다. 내가 졌다.”
 
양국의 치열한 줄다리기와 버티기는 이처럼 마지막 순간까지 계속됐다. 기자가 당시 양국 핵심 관계자들에게 비보도를 전제로 확인했던 내용 중 일부다. 굳이 이를 전하는 건 위안부 합의 검증 태스크포스(TF)의 공식 조사 발표, 이어진 문재인 대통령의 ‘입장문’이 마치 우리가 일방적으로 조급하게 양보했고, 이면 합의가 있었던 것처럼 포장되고 있음을 바로잡기 위함이다.
 
문 대통령은 입장문에서 “내용적으로나 절차적으로나 중대한 흠결이 확인됐다. 이 합의로 위안부 문제가 해결될 수 없다는 점을 다시금 분명히 밝힌다”고 했다.
 
정말 그랬을까. 그랬다면 전 정권의 협상 담당자들은 몇 년도 안 돼 ‘역적’이 될 걸 뻔히 알면서 왜 그런 합의를 했을까.
 
위안부 문제를 지켜봐 온 이라면 내용적 측면에서 꽤 진전된 합의였음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우리의 3대 숙원사항, ▶일 정부의 책임 인정 ▶일 총리의 사죄와 반성 ▶일 정부 예산을 통한 배상이 완벽한 형태는 아니지만 거의 녹아 들어갔다. TF 보고서가 내놓은 ‘비공개 6개 항’ 또한 이면합의가 아니다. 예컨대 “해외 기림비 지원은 적절치 않다”고 일본이 언급한 데 대해 우리가 “그건 정부가 관여하는 게 아니다”고 답한 건 일종의 부동의의 동의(agree to disagree)였다. 이걸 ‘이면 합의’로 엮는 건 오버 중의 오버다. 나머지 두 가지도 우리 정부의 현재 입장과 기본방침을 밝혔을 뿐이다. 쉽게 말하면 현 정부가 중국에 말한 ‘3불’과 다름이 없다.
 
문 대통령은 ‘피해자 중심 해결’을 외쳤다. 듣기엔 참 좋다. 하지만 할머니들, 가족마다 입장과 주장이 제각각이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안다. 목소리 큰 시민단체가 마치 위안부 할머니들 주장을 모두 대변하는 것처럼 돼 있지만 그렇지 않다. 정치와 언론이 왜곡했다. 피해자 모두 100% 만족하는 해결이란 애초 기대하기 힘든 구조다. 그뿐인가. 상대방 일본은 “1mm도 움직일 수 없다”고 한다. 워싱턴은 “진절머리 난다”(전 국무부 관료)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든다. 재협상? 적어도 앞으로 4~5년은 ‘미션 임파서블’에 가깝다.
 
그런 점에서 나는 TF 보고서의 “위안부 문제와 같은 역사 문제는 단기적으로 외교협상이나 정치적 타협으로 해결되기 어렵다”는 대목에 주목한다. 이게 바로 이 정부의 진짜 속내가 아닌가 싶다. 어떤 재합의를 해도 욕먹을 게 뻔하다면 섣부른 재협상 따위 하지 않고 모호한 상태로 역사 카드를 꼭 손에 쥐고 임기 내내 가겠다는 것 아닐까.
 
역설적으로 ‘피해자’들이 맘에 걸린다. 12·28 합의 당시 46명이던 생존 할머니는 불과 2년 사이 32명으로 줄었다. 평균 연령 91세. 위안부 문제가 다시 원점으로 넘어가는 걸 보며 눈을 감으시는 게 과연 그들을 명예롭게 하는 것일까. 그게 피해자 중심일까. 난 “그렇다”고 답할 자신이 없다. 정부는 “그렇다”고 답할 자격이 있을까.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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