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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 report] “문제는 배터리가 아니야” … 아이폰이 놓친 건 혁신과 신뢰

중앙일보 2018.01.01 01:00 경제 2면 지면보기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는 아이팟·아이폰 등 혁신 제품을 내놓기 전 소비자 선호도 조사를 일절 하지 않은 것으로 유명하다. 경영학계에선 이를 두고 “시장 분석에 기초를 둔 마케팅 이론을 완전히 뒤집었다”고 평가했다. 잡스는 선호도 조사를 하지 않는 이유에 대해 “어떤 제품을 원하는지는 소비자 자신도 모른다. 제품을 직접 봐야 알 수 있기 때문”이라고 설명해 왔다. 소비자와의 개방적 소통보다 폐쇄적인 기술 개발에 집중해 온 것이다. 잡스 때부터 이어진 이런 애플의 경영 철학이 ‘배터리 게이트’로 시험대에 오르고 있다.
 

배터리 게이트로 시험대 오른 애플
성능 저하 예상되는 SW 업데이트
소비자에게 ‘진실’ 은폐하고 강행
50달러 보상안도 마지못한 인상
폐쇄적 문화로 정직한 대응 못해
국내 법조계 “일종의 계약 위반”

아이폰 소비자 불만 포인트 3가지

아이폰 소비자 불만 포인트 3가지

애플은 지난해 12월 28일(현지시간) “구형 아이폰(아이폰6·아이폰7 등)의 속도 저하 문제는 배터리 노후화 때문이며 배터리 교체 비용으로 1인당 50 달러(한국은 6만6000원)를 보상하겠다”는 내용의 입장문을 발표했다. 미국에서 소비자 집단소송이 시작된 지 일주일 만이다. 그러나 이런 대응은 오히려 소비자 불만만 더욱 키웠다. 국내 법무법인 한누리 측에 따르면 지난해 12월 31일까지 국내에서만 한누리에 집단소송 의사를 밝힌 사람이 약 18만명에 달했다. 미국 캘리포니아 연방법원에는 9999억 달러(1068조원) 규모의 손해배상청구 집단소송이 제기됐고, 프랑스의 한 소비자단체도 의도적인 기술 저하를 금지한 법률을 위반했다며 형사 소송을 제기했다.
 
사태는 지난해 12월 9일 미국 뉴스 커뮤니티 사이트 ‘레딧’에 한 아이폰 사용자가 제기한 의혹에서 시작됐다. 이 사용자는 “애플이 배터리 잔량이 줄면 아이폰 속도가 느려지도록 운영체계(iOS)를 바꿨다”고 주장했다. 이에 애플은 지난해 12월 20일 “구형 아이폰의 배터리 기능이 나빠지면 전원이 끊기는 현상이 생겨, 이를 막기 위해 처리속도를 늦추는 기능을 운영체제 업그레이드에 도입했다”고 해명했다.
 
해명은 소비자 불만에 기름을 부었다. 애플이 신형 아이폰 교체 수요를 늘리려고 일부러 구형 아이폰의 성능을 떨어뜨렸다는 ‘음모론’도 제기됐다.
 
소비자들은 애플이 지난해 12월 28일 보상책을 제시한 뒤에도 “사태의 심각성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번 집단소송 사태는 단순히 기기 성능이 아니라 세계 최고 혁신 기업으로 믿었던 신뢰가 무너지고 있는 점이 더 큰 문제란 것이다.
 
전문가들은 신뢰 상실의 이유를 크게 3가지로 보고 있다. 우선 소비자들은 애플이 기기 성능 저하가 예상되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시도한 발상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박용후 피와이에이치 대표는 “소비자들은 이번 사태로 스티브 잡스가 살아 있을 때 느낀 애플의 기업가 정신이 사라졌다고 느끼고 있다”며 “외골수처럼 기술을 혁신해 온 애플의 철학을 근본부터 의심하게 된 것”이라고 설명했다.
 
두 번째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 전·후에도 관련 사실을 알리지 않은 점이다. 정옥현 서강대 전자공학과 교수는 “사실대로 얘기했다면 소비자들도 이해했을 텐데, 이를 은폐한 게 화를 키웠다”고 말했다.
 
마지막으로 애플이 “배터리 교체 비용 50달러 보상”이란 해결책을 마지못해 내놓은 인상을 준 것도 소비자 불만을 잠재우기에는 역부족이었다는 것이다. 애플의 보상책에 다르면 구형 아이폰을 쓰다가 신형으로 바꾼 소비자는 아무런 보상을 받을 수 없다. 배터리 교체 비용 일부를 보상하는 수준을 넘어 제품 무상교환이나 전액환불 등의 조치에도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지난 7년 간 전 세계 아이폰 판매량

지난 7년 간 전 세계 아이폰 판매량

애플을 상대로 한 집단소송을 대리하려 하는 한누리·휘명 등 국내 법무법인은 애플의 행동이 사용자가 피해를 볼 수 있는 조치를 게을리 한 일종의 고객과의 계약 의무 위반이라고 본다. 업데이트 이후 기기 성능 저하 가능성을 알리지 않은 것은 소비자에게 제품 정보를 성실하고 정확하게 제공해야 한다는 소비자기본법 위반 소지도 있다고 주장했다. 나아가 제품 성능을 떨어뜨리는 소프트웨어를 고객 동의 없이 깐 것은 일종의 해킹 범죄에 해당할 수도 있다는 주장까지 나온다.
 
삼성전자도 2016년 갤럭시노트7 폭발 사고 당시 소비자 동의 없이 배터리 충전량을 ‘30%’로 제한하는 소프트웨어 업데이트를 한 적이 있다. 다만 삼성전자는 판매 2주 만에 공식으로 사과했고 시중에 팔린 제품 306만대 전량을 리콜 조치했다. 이후에는 생산을 전면 중단했다. 갤럭시노트7을 갤럭시S7으로 교환한 뒤 이듬해 신제품으로 교체하면 기존 단말기 할부금의 50%를 면제하는 혜택도 제시했다. 제3의 기관에 의뢰해 제품 발화 원인을 분석해 소비자와 언론에 상세히 알리기도 했다. 구태언 테크앤로 변호사는 “기기 성능을 낮춘 애플의 행위를 배터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궁여지책으로 볼 수는 있다”며 “다만, 이 과정에서 설명이 부족했던 점은 안타까운 일”이라고 말했다. 결국 소비자 신뢰를 회복하려면 제품 결함을 밝히는 데 만큼은 폐쇄성을 버려야 한다는 지적이다.
 
최순화 동덕여대 국제경영학과 교수는 “애플 특유의 폐쇄성과 비밀주의는 혁신 기술에 대한 사용자의 기대치와 만족감을 높이는 데 그간 긍정적으로 작용했다”며 “하지만 결함으로 인한 소비자 불만에는 최대한 빠르고 정직하게 대응해야 한다는 마케팅 일반 이론을 이번에는 따를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김도년 기자 kim.don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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