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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에서] 화재진압 방해되면 경찰차도 부수는 외국…법은 멀고 소송 가까운 한국

중앙일보 2017.12.30 06:00
“빨리 구해줘. 숨 못 쉬어. 빨리. 우리 다 죽어.”
지난 21일 충북 제천 스포츠센터 화재 참사 당시 다급했던 상황이 담긴 통화 녹취록의 한 부분이다. 홍철호 자유한국당 의원이 소방청으로부터 제출받아 공개한 녹취록에는 건물 내부의 신고자가 ‘빨리’라는 말을 외친 횟수만 79차례에 달했다. “못 기다려” “나 살아야 해” 등 급박했던 순간도 엿보였다. 그런데 눈에 띄는 대목이 있었다. “사람들이 갇혀 전화 오고 난리인데, 2층에 (소방차가) 왜 접근을 못 하고 있느냐”는 외부 신고자의 지적이다.

미국에선 차량 창문 깨고 소방호스 연결하기도
한국은 법 근거 있지만 ‘소방관 책임’ 관행 존재
“세부 시행령 만들어 힘 실어줘야”
관련법은 국회에서 여전히 낮잠

 
제천 참사 당시 불법주차 차량이 도로를 가득 메워 건물 주변 소방차 진입에 어려움을 겪었다는 비판이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29일 현재 청와대 ‘국민청원 및 제안’ 게시판에는 ‘소방차가 출동 중 불법주차된 차량을 손상하거나 밀어버려도 소방관이 책임지지 않게 해달라’는 청원의 서명이 3만5000건을 넘었다. 청원인은 “불법주차 차량들로 인해 (소방차) 접근이 어려워 인명피해가 컸다. 소방차가 차들을 부수거나 밀고 지나갈 수 있어야 한다”고 요청했다.
 
지난 27일 추미애 더불어민주당 대표도 “소방차 진입 도로를 가로막고 있는 불법주차에 대해서 출동한 소방차들이 소유자의 동의 없이 촌각을 다툴 때는 차량을 부수고 화재 진압 장비를 즉각 투입할 수 있는 권한을 부여하는 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말했다. 그는 “영국에는 차량 소유주의 동의 없이 차량을 옮기거나 부술 수 있는 권한이 소방당국에 주어져 있다고 하니 (법 개정에) 참고해 주길 바란다”며 관련 법 개정을 당부했다.
 
 
외국의 경우 불법주차뿐만 아니라 화재 진압과 인명 구조에 방해가 되는 차량은 강제로 부수거나 밀어버릴 수 있는 권한을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다. 영국은 2004년 ‘화재와 구출 서비스법’을 제정해 소방관의 재량에 따라 차를 부술 수 있도록 했다. 미국 오리건주에선 긴급 차량이 보일 때 도로 가장자리로 이동해 정지하지 않으면 720달러(약 77만원)를 물어야 하고, 캐나다도 긴급차량에 양보하지 않으면 최대 2000캐나다달러(약 169만원)를 내야 한다. 차량 소유주가 소방 당국에 손해배상청구를 하기는커녕 오히려 벌금을 내야 한다는 의미다.
 
실제 2014년 캐나다 몬트리올의 한 건물 옥상에서 화재가 발생하자 출동한 소방차가 길가에 주차된 차량을 밀어버린 적도 있다. 경찰차도 예외가 아니었다. 경찰차를 뒤에서 밀어 진입 공간을 확보한 뒤 건물 앞으로 돌진하는 과정에서 근처 차량의 범퍼가 부서졌지만 화재 진압이 우선인 상황이었다. 같은 해 미국 보스턴 화재 진압 현장에선 소방관들이 소화전 앞에 불법주차된 고급 차량 창문을 깨고 소방호스를 연결했다.
 
미국 사진작가 마크 가펑클이 찍은 2014년 보스턴 화재 현장의 사진. 소방관들이 소화전 앞에 불법주차된 고급 차량의 창문을 깨고 호스를 연결했다. 사진=마크 가펑클 트위터 캡쳐

미국 사진작가 마크 가펑클이 찍은 2014년 보스턴 화재 현장의 사진. 소방관들이 소화전 앞에 불법주차된 고급 차량의 창문을 깨고 호스를 연결했다. 사진=마크 가펑클 트위터 캡쳐

같은해 캐나다 몬트리올 화재 당시 소방차가 경찰차를 범퍼로 밀며 진입하고 있다. 사진=유투브 캡쳐

같은해 캐나다 몬트리올 화재 당시 소방차가 경찰차를 범퍼로 밀며 진입하고 있다. 사진=유투브 캡쳐

 
한국도 현행법상 화재 진압 시 방해 차량을 제거하는 게 가능하다. 소방기본법 제25조에 ‘소방차의 통행과 활동에 방해가 되는 주ㆍ정차 차량 및 물건을 제거ㆍ이동시킬 수 있다’고 명시돼 있다. 이에 따른 손실은 관할 시ㆍ도지사가 보상하게 돼 있다. 하지만 실제 사고에서 적용은 쉽지 않다는 게 문제다. 소방청 관계자는 “소방관들이 소송 당사자가 돼 파손 사유를 직접 입증하는 게 관행처럼 돼 있어 (진압에 따른 차량 파손을) 꺼리는 게 현실”이라며 “세부 시행령을 만들어 기존 법에 힘을 실어주거나, 국민 정서가 파손을 허용하는 방향으로 개선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국회 차원의 입법 보완이 절실한데도 관련 법안들은 제대로 논의되지 않고 계류돼 있다. 우선순위에 계속 밀려서다. 우원식 민주당 원내대표는 지난 26일 “법안 처리 속도를 높일 것”이라고 강조했다. 반복되는 인재(人災)를 막으려면 ‘반짝 관심’보다는 지속적인 관심이 필요하다.
 
김록환 기자 rokan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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