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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훈의 시시각각]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

중앙일보 2017.12.30 01:53 종합 26면 지면보기
고대훈 논설위원

고대훈 논설위원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다룬 영화 ‘1987’에서 87학번 대학생 연희(김태리)가 던진 말이 인상적이었다. 진실을 좇는 사람들의 용기가 있을 때 "세상은 바뀔 수 있다”는 반어적 메시지를 영화는 전한다. 그리고 ‘기자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영화에선 은폐된 진실이 살짝 드러나는 아주 짧은 순간을 포착해 처음으로 세상에 알린 ‘신성호 중앙일보 사회부 기자’가 실명으로 등장한다. 성균관대 신방과 교수로 있는 그에게서 당시 상황을 직접 들어봤다.
 

‘박종철 사건’ 조명한 영화 ‘1987’
언론에 권력 감시하라는 메시지

1987년 1월 15일 오전 9시50분. 신 기자는 이홍규 대검찰청 공안4과장 사무실에 들렀다. 주요 사건을 담당한 검사실을 돌며 취재거리를 찾던 중이었다.
 
"경찰 큰일 났어.”(이 과장)
 
"그러게 말입니다.”(신 기자)
 
"그 친구 대학생이라지. 서울대생이라며? 조사를 어떻게 했기에 사람이 죽은 거야. 더구나 남영동에서….”(이 과장)
 
신 기자는 사건의 윤곽을 모르는 상태였다. 임기응변으로 맞장구를 쳤다가 ‘남영동, 서울대생, 사망’이라는 정보를 덥석 물었던 것이다. ‘치안본부(현 경찰청) 대공수사단이 있는 남영동에서 서울대생이 경찰 조사를 받다가 숨진 사건’의 얼개가 그려졌다. 이어 ‘쇼크사’ ‘고문 가능성’ ‘언어학과 3학년 박종철’이라는 사실도 확인했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크사’”. 그날 오후 석간 신문이던 중앙일보 사회면에는 이런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취재에서 기사 작성까지 걸린 2시간, 세로 10㎝도 채 안 되는 작은 기사가 역사의 물줄기를 바꿨다. 이 보도가 없었다면 박종철의 억울한 죽음은 의문사로 남고, 민주화도 지연됐을 것이다. 영화는 이후의 전개과정을 비교적 상세히 그린다. "수사관이 책상을 ‘탁’ 치니 ‘억’하고 쓰러졌다”는 뻔한 거짓말, 이에 속지 않고 동아일보를 비롯한 신문들이 ‘박종철 사건’의 진실을 파헤치며 6월 민주항쟁을 견인하는 장면은 감동적이다. 신 교수는 "현장의 팩트(fact, 사실)와 언론 자유가 얼마나 소중한지 새삼 되돌아보게 한 영화”라고 했다.
 
1987년은 2017년과 포개진다. JTBC의 태블릿PC 특종 이후 촛불집회, 박근혜 탄핵, 문재인 정권 탄생으로 이어지는 전개과정이 30년 전과 매우 흡사하다. 특종과 국정농단을 추적한 언론의 후속 보도가 없었다면 오늘의 문재인 정권은 없었을지 모른다.
 
그러나 두 시기의 언론은 다른 모습이다. 87년 대부분의 언론은 민주화란 가치와 목표를 향해 열정을 모았다. 요즘엔 ‘갈등 유발 저널리즘’이라고 빗댄다. 진영 논리에 매몰돼 분열의 진앙이 되고 있다는 비판이다. 사회 현안을 이분법적 틀에 가둬두고 이념적 스펙트럼을 강요하는 틀짓기(framing)를 한다는 것이다. 때로 하나의 사건이지만 전혀 다른 두 개의 현실을 만들기도 한다. 탈(脫)원전, 북한 핵 미사일, 적폐 청산, 중국 홀대론 등 쟁점마다 정파적 편향에 기대어 팩트가 아닌 그림(painting)을 버무려 낸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니 "(제천 화재 참사 때) 대통령의 숨소리에 울음이 묻어 있었다”는 낯 뜨거운 글(박수현 청와대 대변인)이 공개된다. 이런 ‘문비어천가’를 ‘무지몽매한 국민들’이 믿을 것이라고 착각한 모양이다. "탁 치니 억”이란 억지를 믿으라는 87년으로 돌아간 느낌마저 든다.
 
권력은 쓴소리하는 언론을 싫어한다. "그런다고 세상이 바뀌나요?”라며 기자들을 유혹한다. 영화 ‘1987’은 언론에 권력의 부정과 비리, 위선을 고발하는 ‘감시견’이 되라는 주문이다. 2018년은 개의 해다. 권력의 오만과 독주에 제동을 걸지 못하는 언론은 ‘감시’가 없는 ‘견(犬)’에 불과함을 새겨본다. 
 
고대훈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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