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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취재일기] 겉만 반지르르한 드라마 공화국

중앙일보 2017.12.29 01:55 종합 29면 지면보기
노진호 문화부 기자

노진호 문화부 기자

드라마 물량 면에서 한국 TV는 세계 최강급이다. 1년간 제작되는 드라마가 미니시리즈만 약 100편, 연속극까지 포함하면 150여 편에 이른다. 최근엔 웹드라마까지 가세하고 있으니 ‘드라마 공화국’이란 말이 과장이 아니다. 하지만 한 꺼풀만 벗겨보면 그 민낯이 그대로 드러난다.
 
tvN 드라마 ‘화유기’ 촬영 중 있었던 스태프 추락 사고는 드라마 제작 환경의 부끄러운 자화상이다. 지난 23일 ‘화유기’ 첫 방송 당일 새벽, 스태프 A씨는 세트를 손보다 3m 높이에서 떨어져 중상을 입었다. ‘생방송 드라마’란 소리를 들을 만큼 일정에 쫓기다 보니 한국 드라마 촬영은 이렇듯 늘 밤낮이 없다. 안전사고 예방 조치도 미흡하기 일쑤다.
 
‘화유기’ 감독을 맡은 박홍균 PD의 경우 2006년 MBC 드라마 ‘늑대’ 촬영 때도 새벽 촬영 중 주인공 에릭과 한지민이 교통사고를 당했고, 결국 드라마가 조기 종영됐다. 초반 2~4회 대본만으로 촬영에 들어가다 보니 드라마 중반부터는 신(scene)별로 쪼개져서 나오는 쪽대본을 보며 허겁지겁 촬영하는 것도 당연한 문화가 됐다. 이러니 배우들의 ‘발연기’ 논란이나 종종 있는 방송사고, 잦은 드라마 방영 연기가 이어진다.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일러스트=김회룡 기자]

현장 인력의 인권은 오죽할까. 사극 조연출을 맡았던 한 지상파 드라마 PD는 “모든 드라마 현장이 힘들긴 하지만 최악은 사극 촬영장”이라고 말했다. 그는 “세트가 외진 곳에 있어 위생시설이 열악하고, 제작비를 줄이려고 몰아 찍다 보니 일정이 만만치 않다”며 “여자 스태프들은 생리를 늦추려 사전 피임약까지 함께 돌려먹기도 한다”고 전했다. 지난해 tvN 드라마 ‘혼술남녀’ 종방 다음 날 스스로 목숨을 끊은 조연출 이한빛 PD는 유서에 “하루 20시간 넘는 노동을 부과하고 2~3시간 재운 뒤 다시 불러냈다. 경멸했던 삶이기에 더 이어가기 어려웠다”고 적었다.
 
회당 1억~1억5000만원에 이르는 주연급 배우 출연료는 천정부지로 치솟고, 편성 경쟁은 치열해지면서 드라마 제작 환경은 더 악화되고 있다. 대안으로 거론되는 사전 제작은 시청자 반응을 반영할 수 없고, 제작 후 편성이 될지 불확실하며, 제작비가 늘어난다는 우려로 정착되지 않고 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는 사전 제작으로 가는 게 해법이다.
 
드라마는 명실상부 한류를 태동시킨 대표적 문화 콘텐트다. 그걸 만들어내는 현장이 인권 사각지대라면, ‘한류’니 ‘K 컬처’니 하는 말들도 결국 속 빈 강정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노진호 문화부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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