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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아 그린 할매 화가, 평창 성화 들었다

중앙일보 2017.12.28 01:00 종합 27면 지면보기
26일 경북 안동 지역 77번째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선 노순연 할머니.

26일 경북 안동 지역 77번째 성화 봉송 주자로 나선 노순연 할머니.

“그냥 이상화, 김연아가 내 눈에 예뻐서 그렸지. 이런 일이 생길 줄 어디 알았나요.”
 

경북 예천 80세 노순연 할머니
7년 전 동네 신풍미술관서 배워
선수들 그림 덕에 이색 주자로
“시집가는 날처럼 마음 싱숭생숭”

26일 오후 5시 경북 안동 하회마을 인근에서 오륜 마크가 새겨진 털모자를 쓴 할머니가 지팡이를 짚고 걸음을 떼기 시작했다. 왼손에는 2018 평창 동계올림픽 성화를 들고 있다. 할머니는 느린 걸음으로 200m를 걸어 다음 주자에게 성화를 넘겼다. 이색 봉송 주자는 노순연(80) 할머니다.
 
노 할머니는 경북 예천군 지보면에 사는 전형적인 시골 아지매다. 동네에서 ‘기전댁’으로 불린다. 그런 할머니가 성화를 들게 된 건 한 장의 그림 덕분이다. 스피드·피겨 스케이팅, 스키 등 동계 스포츠 선수들이 질주하는 모습을 태극 문양 위에 담았다. 스피드 스케이팅은 이상화 선수, 피겨 스케이팅은 김연아 선수의 사진을 참고했다.
 
노 할머니가 평창올림픽을 주제로 그린 작품. 태극무늬 속에 스피드 스케이팅 이상화 선수, 피겨 스케이팅 김연아 선수 등을 색연필로 그렸다. [사진 신풍미술관]

노 할머니가 평창올림픽을 주제로 그린 작품. 태극무늬 속에 스피드 스케이팅 이상화 선수, 피겨 스케이팅 김연아 선수 등을 색연필로 그렸다. [사진 신풍미술관]

기전댁 할머니는 동네에서 ‘할머니 화가’로 통한다. 시골 할머니를 화가로 만들어준 사람은 2010년 동네에 문을 연 신풍미술관이다. 이성은 관장이 할머니의 평창올림픽 그림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고, 이걸 본 국민대 스포츠미디어학과 김의진 교수가 그림의 독창성을 보고 평창동계올림픽조직위원회에 추천해 성화봉송 주자로 채택됐다.
 
평생 그림이라고는 모르고 살았던 노 할머니는 7년 전 신풍미술관에서 처음 그림을 접했다. 평생 농촌 여성으로 살면서 가슴이 맺힌 응어리를 매주 1~2회 그림으로 풀었고 그러다 보니 실력이 꽤 향상됐다. 이젠 색연필·크레파스·물감 등 다양한 도구를 능숙하게 다룬다. 평창올림픽 그림은 미술관 숙제였다. 자유주제 숙제를 냈는데, 할머니가 TV에서 이상화·김연아를 보고서 그림에 담았다.
 
노 할머니는 “성화 봉송하는 날이 시집가는 날 같았다”고 말한다. 이날 할머니 응원단은 노 할머니가 한 걸음씩 뗄 때마다 “할매가 그릿니더~”라고 외쳤다. ‘할머니가 그렸습니다’라는 뜻의 사투리다. 슬하의 3남매 중 큰아들 내외가 행사장에 와서 응원했다. “이 나이에 가문의 영광이다 아입니꺼. 평생 몬 잊을낌니더.”
 
백수진 기자 peck.sooj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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