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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New York Times] 미국을 망치는 트럼프의 ‘미국 우선주의’

중앙일보 2017.12.26 02:14 종합 33면 지면보기
수전 라이스 전 유엔 주재 미 대사

수전 라이스 전 유엔 주재 미 대사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18일 미국의 안보에 대한 자신의 구상을 담은 ‘국가안보전략 (NSS: National Security Strategy)’을 발표했다. 내용을 읽어 보니 한마디로 절망적이다. 트럼프 대통령의 안보 전략은 미국의 역대 어떤 대통령의 전략과도 다르다. 트럼프의 머릿속에 미국은 다른 국가가 가진 자원을 뺏어야만 승리할 수 있는 세상에 살고 있다. 공동의 선이나 보편적 원칙 대신 미국적 가치만이 존재한다.
 
내가 모신 버락 오바마 전 대통령은 미국을 ‘영원한 세계적 존재’라 지칭했고, 로널드 레이건 전 대통령은 미국이 “언덕 위에 빛나는 도시”라는 비전을 제시했다. 그러나 트럼프 시대 미국은 더 이상 그런 존재가 아니다. 국수주의적이고 온 세상을 흑백으로 가른 ‘미국 우선주의’만 판치는 나라다. 이런 나라의 외교는 내가 살려면 너는 꿇어야 한다는 제로섬 게임 외엔 옵션이 없다.
 
그러나 세상의 현실은 그렇게 칼로 두부 자르듯 간단하게 재단되지 않는다. 중국과 러시아는 똑같이 미국의 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중국은 미국의 경쟁국이지 공인된 적국이 아니다. 러시아는 다르다. 북대서양조약기구(나토) 체제와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에 대해 정면 반대한다. 조지아와 우크라이나 영토를 버젓이 강점하고, 시리아의 독재자를 비호하기 위해 시민 수천 명의 목숨을 빼앗았다. 러시아야말로 미국의 적이다. 이런 엄연한 사실을 무시하는 것이 내키지 않았던 트럼프 행정부의 현실주의자들은 중국과 러시아를 하나로 묶으면서 중국을 먼저 언급하는 수법을 썼다. 그래야 중국은 증오하면서 러시아는 칭찬하는 ‘트빠’(트럼프를 열렬히 지지하는 국수주의 세력)의 공세를 피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꼼수는 러시아와 중국의 사이만 가깝게 만들어 줘 미국의 국익을 해칠 소지가 다분하다.
 
다만 핵무기와 군축 문제에선 트럼프의 전략은 전통적인 공화당 대통령이 내놓을 법한 전략과 크게 다르지 않다. (북핵 정책 등은) 미국 주류 정치의 범위 안에 있다는 뜻이다. (한국 등) 미국의 동맹국을 확실히 포용하겠다는 건설적 내용도 있다.
 
시론 1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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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트빠’들은 멕시코 국경에 만리장성을 세우겠다는 트럼프의 황당한 반이민 정책을 NSS에 포함시키는 데 성공했다. 골치 아픈 다자무역 협정보다 양자 협정을 선호하는 트럼프의 고질병도 NSS에 그대로 담겼다. 아시아 전역에 노골적으로 세력을 확장 중인 중국의 기세를 견제할 수 있었던 무기인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 폐기를 찬양하는 내용이 들어갔기 때문이다. 트럼프의 이런 어리석은 선택은 복잡한 세상을 이념으로만 판단하는 배타적 안보관을 형성시켰다.
 
트럼프의 NSS는 미국의 전통적 가치들도 대놓고 무시한다. ‘인권’이나 ‘극빈’ 등의 단어는 들어가 있지 않다. 고등교육과 에이즈 퇴치, 중동 평화 협상의 중요성도 논하지 않는다. 세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는 30세 미만 청년들의 인권이나 시민사회의 가치를 존중한다는 내용도, 성적 소수자들의 권리 침해에 대한 우려도 발견할 수 없다. 이렇게 요즘 국제사회의 표준이 된 기본 가치들이 빠져 버린 트럼프의 NSS는 결국 미국의 글로벌 리더십만 땅에 떨어뜨릴 것이다. 다른 나라들의 입장은 몽땅 무시하면서 미국 편에 서라는 주장은 설득력이 없기 때문이다.
 
또 트럼프의 NSS는 겉으로는 외교의 힘을 강조한다. 그러나 트럼프와 렉스 틸러슨 국무장관은 정작 미 국무부에 필요한 자원과 인재를 대주는 건 꺼린다. 또 트럼프는 언론의 자유를 찬양하면서도 툭하면 (NYT 등) 미국의 권위 있는 매체들의 보도를 ‘가짜 뉴스’라고 모욕하며 언론인들을 위협한다. 트럼프는 여성을 폄하하고 인종차별적 언어를 남용하며, 반유대 및 신나치 극단주의 비판은 망설이고 있다.
 
트럼프의 언행에서 드러나는 위선과 모순은 그냥 넘어갈 문제가 아니다. 자기 잇속만 챙기려는 모순된 세계관을 최고라고 떠드는 것부터 구역질 난다. 역대 대통령마다 발표해 온 NSS는 미국의 영원한 유산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역대 행정부의 전략 우선순위를 명확히 해 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미국의 비전과 이해관계를 알고 싶은 세계를 위한 이정표가 되는 것이다.
 
미국의 힘은 독보적인 군사·경제력에서만 나오는 게 아니다. 미국이 가진 이상과 가치에서도 나온다. 지구촌이 지금처럼 어려운 시기에 미국이 도덕적 권위를 놓치게 된다면 (중국 등) 경쟁국의 기세만 살려 주고 미국의 힘은 약화시키게 될 것이다. 트럼프가 외쳐 온 ‘미국 우선주의’에 정면으로 반하는 결과 아닌가.
 
수전 라이스 전 유엔 주재 미 대사
 
◆원문은 중앙일보 전재계약 뉴욕 타임스 신디케이트 22일 게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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