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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정호의 사람 풍경] 말술에 하루 세 갑 담배 끊었다 … 예술도 에너지, 쉰 넘으면 절제

중앙일보 2017.12.23 01:00 종합 16면 지면보기
가수 데뷔 40년 ‘작은 거인’ 김수철
 

인생 2막, 이제 다시 시작
단 1원도 지원 안 받고 150억 쏟아
죽기 전에 우리 소리 꼭 꽃피울 것

환갑까지 달려온 '젊은 그대'
여름휴가나 여행 한 번 간 적 없어
베토벤·비틀스 같은 명곡 남기고파

아직도 멀게 보이는 국악
‘천년학’ 100만 장 신드롬도 한때뿐
전용공연장 하나 없이 제자리걸음

김수철에게 기타는 분신이다. 지금도 매일 1시간 넘게 연습한다. 기타 줄을 잡는 왼손 손가락이 오른손 것보다 0.7cm 늘어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김수철에게 기타는 분신이다. 지금도 매일 1시간 넘게 연습한다. 기타 줄을 잡는 왼손 손가락이 오른손 것보다 0.7cm 늘어났다. [권혁재 사진전문기자]

‘먼 곳에 계셨어도 피우리라. 못다 핀 꽃 한 송이 피우리라.’ 1983년 김수철(60)의 솔로 1집 앨범에 실린 곡이다. 애오라지 한 길을 걷는 사람을 노래했다. 어릴 적 김씨도 “그렇게 살겠다”고 다짐했다. 그를 만나 물었다. “그래 이제 꽃을 피웠나요?” “피우고 못 피우고가 중요하지 않아요. 그냥 죽을 때까지 쭉 갈 뿐이죠.”
 
“간다”고 했다. 84년 2집 앨범의 ‘나도야 간다’도 떠올랐다. ‘젊은 나이를 눈물로 보낼 수 있나. 님 찾아 꿈 찾아 나도야 간다.’ 그가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하지만 ‘거치른 벌판’(‘젊은 그대’)을 달려온 건 안다. 노래라는 님을 좇아, 국악이라는 꿈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온 그가 어느덧 데뷔 40년을 맞았다. 아버지에게 들킬세라 이불을 뒤집어쓰고 기타 줄을 퉁기던 청춘이 나이 환갑이 됐다. 그런데 “다시 시작”이란다. “인생 2막을 열겠다”고 한다. “지금까지 준비였다. 지켜봐 달라”고 당부한다. “자신 있다”고 장담한다.
 
김수철이 이번엔 책을 냈다. 몽당연필을 꾹꾹 눌러 가며 지난 시간을 돌아본 『작은 거인 김수철의 음악 이야기』다. “후배들에게 기록을 남기고 싶었다” 는 고백처럼 그간의 성공과 좌절을 빼곡히 담았다. 가요와 국악, 전통과 현대라는 두 요소를 함께 품어 온 그만의 외로운 노래다.
 
기념무대 없이 40주년이 지나간다.
“100인 규모 오케스트라 공연을 기획했는데 후원자를 찾지 못했다. 10억원 남짓 들여 세계에 없는 우리의 소리를, 우리만의 재미와 감동을 보여주고 싶었다. 이후 세계로 나가려 했다. 올해가 아니면 또 어떤가. 반드시 성공해 보이겠다.”
 
한국과 세계, 둘을 이을 수 있을까.
“일본 가부키를 보라. 전통을 공연 콘텐트로 끌어올려 막대한 수익을 올리고 있다. 자메이카 작곡가 밥 말리도 자기네 고전을 레게 음악으로 만들어 히트시켰다. 우리 음악도 새로운 장르를 만들 수 있다.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대단한 확신이다. 근거가 있나.
“지난 37년간 국악을 공부했다. 음반 37장 중 25장이 국악을 현대화한 것이다. 우리를 너무 몰랐다는 부끄러움에서 출발했다. 국악기를 개량하고, 국악 녹음 방식도 개발했다. 쉽고 재미있는 소리, 대중성 풍부한 소리를 빚으려 했다. 옛 음악과 요즘 청소년을 잇는 다리가 되고자 했다.”
 
국악 음반은 자비로 만들었는데.
“단 1원도 지원받지 않았다. 다른 음악으로 번 돈을 모두 여기에 집어 넣었다. 주경야독이었다. 매일매일 공부했다. 서양음악은 독학했지만 국악은 어려웠다. 중학교 교과서부터 뒤졌다. 전문가를 찾아다녔다. 아쟁, 거문고, 대금, 피리, 태평소를 익혔다. 연주보다 작곡을 위해서였다. 장단을 배우는 게 가장 힘들었다. 중부·호남·영남 등 지역별로 미묘한 차이가 있다.”
 
그간 얼마나 많은 돈을 들였을까.
“얼추 150억원은 될 것 같다. 그 돈으로 건물을 샀다면 떵떵거리며 살지 않았을까. 빌딩에는 관심이 없다. 관리할 능력도 없다. 나는 단순한 사람이다. 건조한 사람이다. 음악을 빼면 별로 할 얘기가 없다.”
 
김수철이 허리띠를 찬 모습이다. 기타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평소에도 버클을 허리 왼쪽에 위치시킨다.

김수철이 허리띠를 찬 모습이다. 기타에 흠집이 나지 않도록 평소에도 버클을 허리 왼쪽에 위치시킨다.

술과 담배도 끊었다고 들었다.
“1995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팔만대장경’ 음반을 준비하면서다. 해인사 장경각에 처음 들어서는 순간 깊고 깊은 기운이 몰아치는 걸 느꼈다. 음악을 핑계로 방만했던 생활을 반성했다. 이후 술 한 잔, 담배 한 모금도 하지 않았다. 그때의 어마어마한 기운이 오늘도 남아 있는 것 같다.”
 
예술가라면 취해도 되지 않나.
“다 뻥이다. 거짓말이다(웃음). 정신이 맑을수록 작업이 잘된다. 술·담배 끊고 일을 더 많이 했다. 그전에는 말술이요, 하루 세 갑은 기본이었다. 젊은 시절 치기는 있을 수 있다. 그런데 예술도 에너지다. 쉰을 넘으면 자기관리를 해야 한다.”
 
국악 하면 영화 ‘서편제’가 기억난다.
“주제곡 ‘천년학’이 신드롬을 일으켰다. OST 음반이 100만 장 넘게 팔렸다. 한국 영화음악 사상, 국악 음반 사상 전무후무한 기록이다. 그때뿐이었다. 20년 넘게 지났지만 국악은 제자리다. 모두 돈, 돈, 돈 하면서 문화가 뒷전으로 밀렸다. 오죽하면 아직 국악 전용 공연장 하나 없지 않은가.”
 
무용음악 ‘불림소리’도 화제였다.
“89년 대한민국 무용제 음악상을 받았다. 대중음악 작곡가가 처음으로 순수음악상을 받았다. 국악기와 서양 오케스트라의 협연을 실험했다. 이후 소리를 확장해 ‘팔만대장경’에선 국악 관현악단과 서양 오케스트라의 만남을 시도했다. ‘불림소리’ ‘팔만대장경’은 계속 시리즈로 만들려고 한다.”
 
국악은 아직도 멀게만 보이는데.
“교육을 받지 못해 그렇다. 많이 듣지 않아 그렇다. 나도 처음에는 졸리기만 했다. 수면제가 따로 없었다. 3년가량 듣고, 또 들으니 소리가 들렸다. 세상에 공짜는 없다. 고진감래다. 노력한 만큼 나온다. 책에는 성공담이 주로 나오지만 나머지는 모두 실패였다. 여태껏 수천 곡을 썼지만 건진 것은 10%도 안 된다.”
 
1991년 ‘세계 한민족 만남’ 공연에서 고(故) 박동진 명창과 함께한 김수철.

1991년 ‘세계 한민족 만남’ 공연에서 고(故) 박동진 명창과 함께한 김수철.

86년 기타산조 장르를 선보였다.
“대중이 편하게 즐길 수 있는 음악이다. 또 세계에서 가장 빨리 통할 수 있는 장르다. 딴따라가 국악 한다고 다니니 처음에는 박대도 많이 받았다. 91년 ‘세계 한민족 공연’을 마친 다음 박동진 명창께서 ‘수철아, 오늘부터 너를 인정한다’고 하셨다.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동안 쉬어갈 틈이 없었겠다.
“여름휴가 한 번 간 적이 없다. 친구들과 여행을 떠난 적도 없다. 일이 있을 때 잠시 들렀을 뿐이다. 세계인을 감동시키는 건강한 소리를 만들고 싶다. 죽기 전까지 베토벤이나 비틀스 같은 음악, 시대·지역을 초월한 소리를 남길 수 있을까.”
 
전성기가 지난 것 아닌가.
“어제를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영광이 무슨 소용인가. 영화·무용·연극 등 나처럼 많은 분야를 시도한 작곡가가 없다. 올림픽·월드컵·엑스포 음악도 했다. 이제는 세계에 내놓을 공연문화 콘텐트다. 그 중심에 국악의 현대화가 있다. 앞으로 3~5년 연주할 곡을 준비해 놓았다. 앨범 10개도 만들 수 있다. 개인 차원에서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정부나 기업의 도움이 절실하다.”
 
가요가 한류를 이끄는 시대다.
“대중음악은 유행이다. 바람을 탄다. 방탄소년단이 반갑지만 한계는 있다. 싸이 열풍도 이내 식었다. 오래가는 건 순수예술이다. 그게 문화경쟁력이다. 소설가 한강이 알려졌지만 다른 분야도 일어서야 한다. 중국·일본에 비해 아직도 세계는 한국 문화를 모른다. 위기가 곧 기회다.”
 
박정호 문화전문기자·논설위원 jhlogos@joongang.co.kr
[S BOX] 김수철의 은인 안성기 "정말 친형 같은 형"
고래사냥에서 김수철과 안성기

고래사냥에서 김수철과 안성기

 김수철에게 무리한 부탁을 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 그의 소리를 알아듣는 사람, 즉 지음(知音) 한 명을 꼽아달라”고 했다. 그간 숱한 사람을 사귀어 왔기에 대답하기 어려울 줄 알았다. 그런데 선뜻 “안성기 형이요”다. 안성기(65)는 동생 수철의 책 발간을 축하했다. “김수철은 국악과 서양음악의 접점을 찾아 언제나 ‘애처롭게’ 매진하고 있다”고 추천사를 썼다. ‘애처롭다’ 밑에는 ‘사랑한다’가 깔려 있으리라….
 
김수철은 대학 시절 안성기를 처음 만났다. 그를 스타덤에 올린 영화 ‘고래사냥’(사진)도 안성기 덕분에 출연하게 됐다. 김수철이 책을 내자마자 안성기에게 달려가 “형, 고마워” 한 것도 지난 40년간 쌓아온 우정 때문이다. “국악 음반을 내느라 빚에 몰린 적이 많았어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상황, 굉장히 큰돈을 몇 번이나 빌려달라고 했는데 ‘알았어’ 한마디면 끝이었습니다. 아주 조건도 달지 않았어요. 그다음 날 바로 입금을 했죠. 형수님도 선뜻 ‘OK’를 해주었고요. 정말 친형 같은 형입니다.”
 
다시 우문(愚問)을 던졌다. “그러면 동생은 무엇을 해주었나요?” “그러고 보니 형을 사랑한 것 외에 아무것도 준 것이 없네요. 평생 갚아야겠어요. 푸하하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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