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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봄을 잉태할 수 없는 혹독한 겨울의 기억들

중앙일보 2017.12.23 01:00 종합 26면 지면보기
중앙일보·교보문고 선정 '2017 올해의 책 10' 
 
바깥은 여름

바깥은 여름

바깥은 여름
김애란 지음
문학동네 
 
[소설] 언어란 차이들의 체계여서, ‘바깥’이란 단어는 ‘바깥 아닌 곳’, 가령 ‘안’과의 차이에 의해서만 의미를 지닌다. ‘여름’이란 단어도 마찬가지다. 여름처럼 싱그럽지 않은 계절들, 가령 ‘겨울’과의 차이가 ‘여름’에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니 누군가 ‘바깥은 여름’이라고 말했다면 그 말에는 필시 ‘안은 겨울’이라는 말의 흔적이 남는다.
 
따라서 김애란의 소설집 『바깥은 여름』에 실린 일곱 단편들을 읽는 독법이, ‘안은 겨울’이 되어야 한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유리 볼 안에선 하얀 눈보라가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풍경의 쓸모’)인 세계, 내부와 외부의 이 시차가 『바깥은 여름』의 주제다.
 
물론 여름이 ‘바깥’의 일이므로, 이 소설집의 주인공들은 대체로 겨울 ‘안’에서 산다. 얼마만큼 겨울인가 하면, 이제 막 제 이름 쓰는 법을 배우던 아이를 화장터에서 떠나보내며 차마 ‘잘 가’라 말하지 못하고 ‘잘 자’라 말하는 부모의 마음만큼 겨울이다(‘입동’). 젊은 날의 꿈을 이루느라 꿈을 다 소진해 버린 12월 26일의 노량진만큼 겨울이고, 남편을 잃은 젊은 여자가 ‘시리’에게 던지는 “고통이란 무엇인가요?”라는 질문만큼 겨울이다. 그런 의미에서 단편 ‘입동’은 최근 김애란의 소설 세계에 일어난 변화를 집약한다. ‘입동’, 그러니까 ‘겨울에 들다’.
 
그런데 일곱 편의 단편들을 읽어보자니 이 겨울은 머지않아 봄이 예비 되어 있는 그런 겨울이 아니다. 갑자기 죽어 버린 아이의 기억만큼이나 길어질 겨울이다.
 
언제나 겨울, 언제나 입동인 이 세계는, 이전의 김애란이 속해 있던 세계와 판이하다. 곤궁한 자들에게도 자주 유머를 부여하고, 비참한 삶 속에서도 순진무구를 잃지 않던 『달려라 아비』 『침이 고인다』 『비행운』 『두근두근 내 인생』의 작가는, 『바깥은 여름』의 작가와 같은 작가가 아니다. 물론 이런 단절의 시점은 특정할 수 있다. 2014년 4월 16일. 김애란의 소설은 그날 이전과 이후로 확연히 갈린다.
 
아이들이 죽고 나서 얼마 지나지 않아 김애란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안산에서 이제는 말 몇 개가 아닌 문법 자체가 파괴됐다는 느낌을 받았다. 어떤 낱말이 가리키는 대상과 그 뜻이 일치하지 못하고 흔들리는 걸, 기의와 기표의 약속이 무참히 깨지는 걸 보았다(‘기우는 봄, 우리가 본 것’).”
 
말을 다루는 작가에게 가장 두려운 일은 문법이 파괴되어 낱말이 대상을 지시하지 못하게 되는 사태다. 그런 일이 2014년 4월 16일에 일어났다. 그리고 이 소설집에 실린 일곱 단편들 중 여섯 편을 김애란은 바로 그 파괴된 문법의 잔해 위에서 썼다.
 
매일 매일이 입동 같았던 지난 3년, 그 혹독한 겨울을 온 몸으로 겪어낸 문장들이 『바깥은 여름』의 문장들이다. 『바깥은 여름』은 현재 한국 문학이 앓고 있는 필연적이고도 윤리적인 우울증의 가장 탁월한 증례다.
 
김형중 조선대 국문과 교수·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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