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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에서 하이힐 신기보다 한라산 눈꽃 트레킹이 더 쉽더라

중앙일보 2017.12.20 00:01
겨울 한라산의 문턱은 의외로 낮다. 등산 초보라도 영실 코스를 따라 한라산에 오르면 윗세오름과 분화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분화벽 안에 백록담이 있다.

겨울 한라산의 문턱은 의외로 낮다. 등산 초보라도 영실 코스를 따라 한라산에 오르면 윗세오름과 분화벽을 눈에 담을 수 있다. 분화벽 안에 백록담이 있다.

등산 왕초보가 우리나라 최고봉 한라산(1950m)을, 그것도 겨울에 올랐다. 여기 산행기를 푸는 건 월 1회 이상 산으로 향하는 1800만여 명(산림청, 2015년)의 등산 고수를 위해서가 아니다. 등산보다 쇼핑이 훨씬 재미있는 여가활동이라 굳게 믿는, 아직 겨울 한라산을 경험하지 못한 나와 비슷한 이들에게 새로운 세계를 알려주고자 함이다. 겨울 한라산 등반은 별 게 아니었고 한라산 설경은 정녕 별것이었다고. 도시에서 하이힐 신고 다닐 체력만 있으면 백화점 크리스마스트리보다 더 반짝거리는 흰 눈꽃을 볼 수 있다고 말이다.  
하이힐만 신어도 오를 수 있다고?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서 바라본 한라산. 정상 부근엔 겨우내 눈이 쌓여 있다. 하얀 고깔모자를 쓴 듯하다.

서귀포시 남원읍 수망리에서 바라본 한라산. 정상 부근엔 겨우내 눈이 쌓여 있다. 하얀 고깔모자를 쓴 듯하다.

신발장 깊숙이 박아 둔 등산화를 만지작거리게 만드는 풍경이 있었다. 겨울 딱 한 시즌 볼 수 있는 한라산 눈꽃이다. 한라산은 겨우내 하얗게 센 정수리를 이고 있다. 그 속에 들어서면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해 나뭇가지마다 엉겨 붙은 두툼한 상고대가 보인다는데, 그 하얀 세상은 지금까지 오로지 사진으로만 접할 뿐이었다. 한라산은 덕유산이나 설악산같이 케이블카가 연결되지도 않아 애초 그 풍경을 실제로 볼 생각은 접어뒀다. “하이힐 신을 체력이 있으면 한라산 오르는 데 문제가 없다”는 자칭 타칭 한라산 전문가 이원근 여행박사 국내여행팀장의 말을 듣기 전까지는 말이다. 

등산 초보의 첫 겨울 등정기
해발 1000m 택시 타고 숨 고르기
40분만 계단 오르면 하얀 세상이

평생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한라산 눈꽃.

평생 볼 일 없을 거라 생각했던 한라산 눈꽃.

한라산을 100번쯤 올랐다는 이 팀장은 한라산 분화구를 바라보면서 걷는 5개 코스 중 백록담 등반을 목적으로 삼는 성판악 코스 말고, 백록담 기준 남서쪽에서 출발하는 영실 코스를 추천했다. 이 코스라면 등산 초보도 ‘손쉽게’ 한라산 산행이 가능하다고 했다. 또 영실 코스는 등산하는 내내 반짝거리는 눈꽃을 감상하기도 제격이란다. 여자라면 안다. 반짝거리는 무언가가 눈앞에 있다면 서너 시간쯤 힐을 신고 백화점을 누벼도 끄떡없다는 사실을. 그렇게 기대 반, 걱정 반으로 12월 셋째 주 제주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해발 1000m에서 ‘택시’를 외치다
영실 코스를 타는 한라산 산행은 풍문으로 들어온 것과 다른 점이 많았다. 먼저 출발 시각. 한라산에 오르려면 새벽녘 출발해 늦은 오후에나 하산할 수 있다는 얘기를 들었는데, 이번 여행은 아침나절 여유롭기 짝이 없었다. 아침에 사우나도 가고 호텔 조식도 먹었다. 성판악 코스는 입산에서 하산까지 장장 10시간이 걸리지만, 영실 코스는 왕복 4~5시간만 잡으면 되기 때문이다.  
겨울 산행은 복장도 남달라야 할 것 같았는데 이 팀장은 평소 입는 방한복 그대로 입으라 주문했다. 고어텍스 등 고가의 등산복 대신 겨우내 입던 패딩 점퍼를 걸쳤다. 딱 한 가지, 등산화에 끼는 아이젠은 따로 준비했다. 백상아리 이빨처럼 생긴 아이젠은 발이 미끄러지지 않고 눈밭을 거침없이 걷게 하는 등산용품이다. 등산 전날 제주시에서 3만원에 장만했다. 
한라산에는 놀랍게도 택시가 다닌다. 영실탐방안내소와 영실휴게소 사이를 잇는 택시.

한라산에는 놀랍게도 택시가 다닌다. 영실탐방안내소와 영실휴게소 사이를 잇는 택시.

겨울 산행의 필수품 아이젠.

겨울 산행의 필수품 아이젠.

나름 만만의(?) 준비를 하고 드디어 한라산 등반을 위해 렌터카로 이동했다. 영실 코스는 해발 1000m 영실탐방안내소에서 시작해 영실휴게소(해발 1280m)~병풍바위(1600m)~윗세오름(1700m)~남벽분기점(1600m)까지 8.2㎞ 이어진다. ‘해발 1700m까지 딱 700m만 고생해서 오르자’고 생각했는데, 케이블카보다 반가운 문명 세계가 보였다. 택시다. 영실탐방안내소에서 영실휴게소까지 2.4㎞ 구간(해발 1280m)은 서귀포시에서 특별 허가를 받은 택시를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택시비는 한 명이 타든 4명이 타든 편도 1만원이다. 스터드 타이어, 일명 못 박은 타이어를 장착한 택시는 눈길을 거침없이 달렸다. 
영실 코스 초입에서 마주하게 되는 영실분화구 능선 구간. 계단이 가파르지만 못 오를 정도는 아니니 겁 먹을 필요가 없다.

영실 코스 초입에서 마주하게 되는 영실분화구 능선 구간. 계단이 가파르지만 못 오를 정도는 아니니 겁 먹을 필요가 없다.

챙길 것은 등산 스틱 말고 컵라면이더라
영실휴게소부터 본격 등산 코스로 진입했다. 서울에 영하 10도 한파가 몰아치던 날 영상 8도의 제주는 빠르게 걸으면 땀이 날 정도였다. 그래도 1000m 고도를 넘어서니 수은주는 영하 4도로 떨어졌다. 서늘한 기운을 느낄 새 없이 영실 코스 최대 난관 병풍바위 경사 구간이 드러났다. 한라산국립공원관리사무소는 영실분화구 능선을 따라 걷는 이 구간의 난이도를 A등급(어려움)으로 책정했다. 영실코스 나머지 구간은 전부 C등급(쉬움)이다.  
병풍바위까지 가파른 능선을 타고 올라오면 한라산 용암이 천천히 흘러내려 굳어진 고위평탄면이 드러난다. 병풍바위까지 올랐으면 고생 끝이다.

병풍바위까지 가파른 능선을 타고 올라오면 한라산 용암이 천천히 흘러내려 굳어진 고위평탄면이 드러난다. 병풍바위까지 올랐으면 고생 끝이다.

과연 난이도A는 만만한 게 아니었다. 가파른 경사를 한발 한발 오르니 금세 숨이 찼고, 송골송골 땀이 이마에 맺힐 새 없이 식었다. 다른 등산객은 고도가 높아지면서 점점 트이는 시야에 환호했지만, 훤히 드러난 한라산 오름 군락, 또렷이 보이는 서귀포시 전망에 감동할 여유가 없었다. 40분간 직선거리로는 1.5㎞를 올랐고 해발고도는 1300m에서 1550m로 높아졌다. 터질 듯한 심장을 달래려 큰 숨을 몰아쉬었다. 푸릇푸릇했던 사위는 어느새 새하얀 세상으로 변했다. 딱 40분 고생하고 나니 어느덧 병풍바위 위에 올라선 것이다. 이제 고위평탄면 같은 산속의 대지를 타박타박 걸어가기만 하면 됐다.
등산로 곳곳에 보이는 노루(라고 믿고 싶은) 발자국.

등산로 곳곳에 보이는 노루(라고 믿고 싶은) 발자국.

흰 눈과 흰 구름을 발 아래 두는 눈꽃 트레킹.

흰 눈과 흰 구름을 발 아래 두는 눈꽃 트레킹.

긴장이 누그러지자 풍경이 눈에 와 박혔다. 문외한인 내게도 왜 한라산이 우리나라 최고의 눈꽃 여행지로 꼽히는지 알만했다. 한라산 눈꽃은 왜소하지 않고 화려했다. 한라산에 자생하는 우리나라 고유종 구상나무는 한겨울에도 푸른 잎을 떨구지 않는 상록수인데 구상나무 잎사귀에 상고대가 얼어 미러볼처럼 보였다. 
눈 세상은 생각보다 풍광이 다채로웠다. 구상나무 군락지는 눈 조명을 잔뜩 달아 놓은 터널같이 아기자기했다. 한라산 정상 분화구 주변은 시야를 가리는 나무 한 그루 없이 허연 대지가 드러나 시원했다. 하얀 산 아래 하얀 구름을 내려다봤다. 두 발로 이 산에 오르지 않으면 절대 볼 수 없는 풍경이었다. 딱 40분 고생한 것 치고, 얻는 대가가 크다고 생각했다. 
구상나무에 엉겨붙은 상고대.

구상나무에 엉겨붙은 상고대.

윗세오름 부근은 힘들 것이 없는 평탄한 길이다.

윗세오름 부근은 힘들 것이 없는 평탄한 길이다.

숲길을 걷는 것처럼 뽀드득뽀드득 눈길을 밟고 목적지 윗세오름에 도착했다. 영실 코스는 윗세오름부터 남벽분기점까지 이어지지만, 방향을 틀어 한라산 정상 기준 북서쪽 어리목코스로 하산하기로 했다. 해발 1700m 윗세오름대피소 매점에 들러 컵라면으로 생애 최초 한라산 등반을 자축하기로 했다. 웬걸. 매점 문은 굳게 닫혔다. 2017년 10월 28일부로 매점 직원들이 파업에 돌입했단다. 컵라면에 뜨거운 물까지 챙겨와 후루룩후루룩 라면을 먹는 사람들이 그렇게 부러울 수 없었다. 그 순간 라면은 세상에서 가장 맛있어 보이는 음식이었다. 라면을 먹어야 한라산 등산의 완성이라는데, 아직 나의 겨울 한라산은 미완성이다. 다시 산을 오르겠냐고? 물론이다. 눈꽃 풍경도, 꿀맛 라면도 오른 자의 몫이므로.  
아쉬운대로 컵라면 대신 소주 한모금으로 한라산 눈꽃트레킹을 마무리했다.

아쉬운대로 컵라면 대신 소주 한모금으로 한라산 눈꽃트레킹을 마무리했다.

 
◇여행정보=한라산 정상 부근까지 닿는 등산 코스는 모두 5개. 영실휴게소부터 윗세오름까지 걷는 영실 코스는 편도 1시간 30분 거리로 가장 난도가 낮다. 한라산 입산 전 한라산국립공원 홈페이지(hallasan.go.kr)를 통해 통제 여부를 확인해야 한다. 눈이 많이 내리면 입산이 금지되는 경우가 있다. 아이젠과 물, 간식 등을 챙겨야 한다. 여행사 여행박사(tourbaksa.com)는 산행 가이드가 함께 한라산 영실 코스를 걷는 1박 2일 눈꽃 트레킹 상품을 판매한다. 대한항공을 이용하고 제주KAL호텔에서 숙박한다. 조식 포함. 2월 12일까지 매일 출발. 27만원부터. 영실탐방안내소~영실휴게소 택시 이동비용이 포함됐다. 070-7017-2237.
 
제주=글·사진 양보라 기자 bora@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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