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김현기의 시시각각] 당당하거나, 제대로 굽신거리거나

중앙일보 2017.12.19 02:04 종합 34면 지면보기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지난주 미국 워싱턴의 토론회장에 트럼프 대통령의 오랜 지기인 윌버 로스 상무장관이 참석했다. 그의 인사말 중 신경에 영 거슬리는 부분이 있었다.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 난 외환위기 당시 한국을 도와 ‘김대정’으로부터 훈장도 받았다.” 긴밀한 유대 속에 큰돈을 챙기게 해줬던, 훈장까지 준 대통령 이름의 발음까지 틀리다니(게다가 대통령이란 호칭도 안 썼다), ‘한국 하대’의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아베, 트럼프에 굽신했지만 목표 달성
우린 굴욕은 굴욕대로, 마음도 못 얻어

근데 이건 하대 수준에도 끼지 못했다. 국빈초청을 받고 간 중국에서 ‘정상’인 문재인 대통령은 대략 일곱 가지 정도의 ‘비정상’ 수모를 당했다. 공동성명 생략, 차관보급 공항 영접, 대통령 어깨를 툭 친 왕이 외교부장, 3끼 연속(총 6끼) 혼밥, 리커창 총리의 오찬 거부, 한·중 경제인 회담에 기업 최고위 인사 대거 불참, 그리고 수행기자 집단폭행이다. 이 정도 비정상이면 최근 10여 년 최대의 외교참사임이 틀림없다.
 
대통령의 찬밥, 혼밥보다 더 큰 문제는 우리 국민의 몸과 마음에 피멍이 들었다는 점이다. 그런데도 “이번 방중으로 경제성장률이 0.2%포인트 오를 것”이라 SNS 셀프 홍보에 열중하는 청와대 인사들의 두뇌 회로가 가히 의심스럽다. 실현되지 않은 0.2%포인트를 외친다고 ‘실현된’ 국민의 자괴감 200% 상승이 어디 가겠는가. 외교·공보 라인은 전원 교체돼야 마땅하다.
 
외교란 총성 없는 전쟁이다. 결과가 모든 걸 말해 준다. 국격을 지키는 당당한 외교가 최선이지만 그러기 힘들 경우 온갖 전략·전술·작전이 동원되는 이유다. 지난해 말 트럼프 당선 후 아베 일본 총리는 뉴욕 트럼프 타워로 달려가 금딱지 골프채를 안겼다. “아양을 떤다”는 비판도 있었다. 그때 아베가 사석에서 털어놓았다는 이야기는 많은 걸 생각하게 한다. “야쿠자(일본 조직폭력배)를 다루는 법은 딱 두 가지 있다. 하나는 칼을 든 야쿠자에게 총으로 맞서는 것, 또 하나는 야쿠자의 구두를 핥는 것이다.” 아베는 후자를 택했다. 나름의 선택이었다.
 
중국학 개척자로 불리는 서진영 고려대 명예교수는 “문재인 정부는 시정잡배의 가랑이를 기어가며 굴욕을 참았던 한신과 병자호란 때 최명길의 심정으로 이번 회담에 임했을 수 있다”고 지적했다. ‘아베의 선택’과 같은 맥락이란 분석이다. 백번 양보해 우리 또한 어쩔 수 없었다 치자. 하지만 결정적 차이가 있었다. 아베는 트럼프의 마음을 샀고, ‘베프(베스트 프렌드)’가 됐다. 거의 모든 한반도 정책이 아베와의 통화에서 나오게 만들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굴욕은 굴욕대로 당하고 마음은 얻지 못했다. 안 하니만 못한 꼴이 됐다. 상대와 결과가 정반대였다. 중국은 우리에겐 ‘한반도 전쟁 절대 불가’를 외치게 해놓곤 뒤로는 난민수용소와 이동통신 시설 확장을 지난 1일자 공문으로 지시했다. 우리와 함께 갈 생각 따위는 없는 상대였다. 양보만 가로채가고 제대로 된 북핵 대응 하나 내놓지 않은 것만 봐도 그렇다. 순진하고 어리석은 짝사랑이었다. 오히려 ‘3불 선언’에 ‘군사옵션 불가’를 외치다 혈맹 미국의 뒤통수를 치고 말았다. 미 중앙정보국(CIA) 출신 한 인사는 “미국은 앞으로 대북 군사행동 시 한국에 사전정보를 결코 주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섬뜩한 말이다.
 
‘역사의 아버지’로 불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토스는 “오만은 신의 징벌을 받는다”고 했다. 오만한 자는 결국 쇠락한다는 말이다. 그럼 중국이 쇠락할까. 아니면 중국에 연신 당하고도 뭐가 잘못된 건지 모르거나 혹은 모른 척하는 ‘내부의 오만함’에 빠진 우리가 먼저 쇠락할까. 오늘의 짓밟힘은 긴 쇠락의 시작일 수도 있다. 
 
김현기 워싱턴 총국장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