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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수대] 관군을 어찌 이기나

중앙일보 2017.12.19 02:03 종합 35면 지면보기
나현철 논설위원

나현철 논설위원

한 금융지주 회장에게 ‘알아서 물러나라’는 전언이 갔다. 그가 “그럴 이유가 없다”며 버티자 금융 당국이 나섰다. 은행 안팎을 샅샅이 뒤져 그의 흠결을 찾았다. 큰 문제가 아닌 대출과 투자 몇 건이 나왔고, 이를 빌미 삼아 강제로 물러나게 하겠다고 위협했다. 기자들의 관심은 이사회 구성원, 특히 사외이사에게 집중됐다. 과반수인 이들의 뜻에 따라 회장의 진퇴가 결정되기 때문이었다. 그러길 며칠, 아무리 연락해도 감감무소식이던 한 사외이사가 전화를 받았다. 회장이 물러나는 것으로 내부적으로 정리가 됐다고 했다. 이유를 묻자 그가 반문했다. “관군을 어찌 이깁니까?”
 
은행은 대표적인 규제산업이다. 은행업을 하기 위한 라이선스가 있어야 하고 상품 하나하나 당국의 승인이나 감독을 받는다. 돈줄을 묶고 여는 정부 정책에 따라 수익이 좌우된다. 그러니 정부 지분이 하나도 없는 민간은행이라도 관치가 통한다. 그 사외이사의 말도 “당국에 밉보이면 회장뿐 아니라 은행 전체에 악영향을 미치니 어쩔 수 없다”는 의미였을 것이다.
 
관치를 꼭 나쁘게만 볼 필요는 없다. 작은 불씨도 가만 놔두면 자칫 대형사고로 연결되는 게 금융의 속성이다. 자살 보험금이나 키코 사태만 해도 당국이 좀 더 일찍 개입했으면 사회적 혼란을 줄일 수 있었다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렇다 해도 영업행위가 아닌 최고경영자(CEO) 선임에까지 개입하는 건 누가 봐도 무리한 일이다. 하지만 ‘당국의 뜻’이 결국 관철돼온 게 한국 금융의 실상이기도 하다.
 
여러 원인이 있지만 주식회사에 걸맞지 않은 지배구조 탓이 크다. 제왕적 회장은 주주 이익보다 자신의 연임을 우선시한다. 방해가 될 유력 후계자는 철저히 견제해 낙마시킨다. 회장 선출권을 쥔 사외이사는 거꾸로 자신의 임면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현직 회장의 눈치를 본다. 많은 경영진과 사외이사들이 진짜 주인인 주주를 위해 헌신하기보다 ‘그들만의 리그’에서 안주하고 있다는 비판이 많다. 그러니 당국이 그럴듯한 명분을 내세우면 우군이 사라지고 버티기가 힘들어진다. 최근 몇몇 금융지주 회장 연임을 둘러싼 논란도 비슷한 구도로 흐르고 있는 것 같다. 관치전쟁의 승패를 가를 주주의 성원이 어느 쪽으로 향할지 궁금하다.
 
나현철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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