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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7’ … 기억 저편서 다시 불러온 그때 그 시간

중앙일보 2017.12.19 01:03 종합 23면 지면보기
영화‘1987’은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한다. [사진 CJ E&M]

영화‘1987’은 서울대생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으로 시작한다. [사진 CJ E&M]

자신이 연출한 영화 ‘1987’의 언론 시사를 마치고 기자간담회에 참석한 장준환 감독은 첫인사를 하면서도 눈물을 훔쳤다. “죄송하다. (영화를) 여러 차례 봤는데도 눈물을 참을 수 없다”고 간신히 운을 뗀 그는 “내가 만든 영화를 보며 눈물을 흘려 부끄럽다”고 말했다. “비록 상업영화이지만 진심으로 만들었다”는 말이 빈말로 들리지 않았다.
 

장준환 감독의 영화 27일 개봉
박종철 고문치사부터 6·10 까지
격동의 시간을 숨막히는 드라마로
톱스타들 조연·단역 불사한 열연

사실 ‘1987’은 자칫 무모한 도전으로 그칠 수도 있었다. 1987년 1월 발생한 박종철 고문치사사건과 6월 항쟁까지의 이야기를 2017년에 보고 싶어하는 관객이 과연 얼마나 될지 모를 일이었다. 더구나 그 시간을 직접 경험하고 지켜보고, 또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이들이 많다는 사실은 영화 제작진에게 큰 부담이 아닐 수 없었다. 사실적인 재현과 극적인 연출, 균형이 조금만 흐트러져도 비난받을 공산이 커 보였다.
 
그러나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것은 기우였다. 영화 ‘1987’은 기억 저편에 과거로 봉인돼 있던 1987년의 공기를 2시간 동안 가슴 졸이며 지켜봐야 하는 드라마로 재현해냈다. 무겁지만 역동적이고, 따뜻하면서도 울림이 크다. ‘1987’은 6월 민주항쟁을 정면으로 마주 본 첫 한국영화인 동시에 한국 현대사를 다룬 영화로는 완성도 등 여러 면에서 한 획을 긋는 영화로 기록될 듯하다. “주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얼마나 뜨거웠는지를 기억하기 위해 영화 ‘1987’을 만들었다”는 장준환 감독과 제작진이 빚어낸 ‘묵직한 한방’이다.
 
사건을 파헤치는 전기를 마련하는 서울지검 최검사(하정우)와 윤기자(이희준). [사진 CJ E&M]

사건을 파헤치는 전기를 마련하는 서울지검 최검사(하정우)와 윤기자(이희준). [사진 CJ E&M]

영화는 철저하게 그 시대를 살아간 사람들의 드라마로 채워져 있다. 1987년 1월 14일, 서울 남영동 대공분실에서 서울대생 박종철이 사망하자 곧바로 증거 인멸을 시도한다. 간첩 및 용공 사건을 전담하는 대공수사처 박처장(김윤석)의 지시로 시신을 화장하려 하는데 사망 당일 당직이었던 서울지검 최 검사(하정우)가 화장 동의서에 날인을 거부하고 부검을 밀어붙인다. 치안본부장(우현)은 부랴부랴 취재진을 모아 ‘단순 심장 쇼크사’라고 거짓 발표를 한다.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고.
 
영화는 멀티 캐스팅 영화의 전범이라 할만하다. 한 캐릭터가 처음부터 끝까지 끌고 가는 영화가 아닌 데다, 한 인물도 허투루 그리지 않은 치밀한 연출 때문이다. 대공수사처 박처장(김윤석), 최검사(하정우), 수감 중인 운동권 인사의 옥중 서신을 배달하는 교도관 한병용(유해진), 87학번 대학생 연희(김태리), 사건 담당 윤기자(이희준), 재야인사 김정남(설경구), 대공형사 조반장(박희순), 중앙일보 사회부장(오달수), 동아일보 사회부장(고창석)…, 말 그대로 ‘배우 군단’이 줄줄이 릴레이 하듯 등장해 거대한 퍼즐의 작은 조각 역할을 하고 빠진다. ‘어벤져스급’ 배우 군단의 군더더기 없는 연기가 영화를 이끄는 큰 힘이다. 장 감독은 “모두가 주인공인 영화”라고 거듭 강조했다.
 
재야인사 김정남 역 설경구. ‘1987’은 톱스타들이 주연 외에 조연·단역으로도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사진 CJ E&M]

재야인사 김정남 역 설경구. ‘1987’은 톱스타들이 주연 외에 조연·단역으로도 인상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사진 CJ E&M]

‘모두가 주인공’인 이야기는 분명한 역사의식을 담고 있지만, 연출 면에 있어서 리스크가 큰 구조다. 자칫 이야기가 구심점을 잃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감독은 단단한 집중력으로 극을 틀어쥐고 간다. 인물들의 미묘한 감정 변화까지 디테일을 살려 배우들의 연기를 조율하며 사실적인 재현과 극적인 연출, 양면에서 균형감각을 발휘한 점이 단연 돋보인다.
 
장준환(48) 감독은 충무로에서 오랫동안 ‘천재 감독’으로 주목받아온 인물. 외계인이라 믿는 자들에 맞서 나 홀로 지구를 지키고자 했던 청년의 이야기를 그린 첫 영화 ‘지구를 지켜라’(2003)로 독특한 상상력을 보여줬지만, 흥행에선 성공하지 못했다. 그 후 10년 만에 내놓은 두 번째 영화 ‘화이:괴물을 삼킨 아이’(2013년)로 주목받았지만, 이 영화 역시 감독에 대한 기대, 배우들의 이름값에는 못 미치는 성적(관객 230만명)을 거뒀다. 그동안 기존 영화의 틀을 뛰어넘는 접근법으로 일관해온 장 감독의 뚝심이 ‘1987’에서 드디어 빛을 발한 듯하다.
 
제작진은 ‘어떻게 진정성 있게 보여줄 것인가?’를 가장 많이 고민했다고 한다. 철저한 고증을 통해 재현했다는 80년대 신문사 편집국, 스노우 진과 청자켓의 백골단 무리들, 남영동 고문실, 연세대 정문 등은 사실감 있게 재창조됐다. 80년대 시절의 질감을 살리기 위해 카메라 렌즈에 변화를 주고, 핸드헬드 촬영 등으로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느낌을 십분 살려낸 촬영도 눈에 띈다.
 
아쉬운 부분이 없진 않다. 전통적인 촬영기법으로 인물의 감정을 강조하기 위해 급작스러운 ‘줌인’을 많이 쓴 것은 극의 몰입을 방해하는 요소다. ‘응답하라 1988’처럼 남녀 대학생(강동원· 김태리)을 그린 부분은 극적인 고조를 위해 필요한 설정일 수 있지만, 전체 드라마에 비해 리듬이 다소 늘어진다. 그럼에도 ‘1987’은 온통 ‘지뢰밭’투성이의 길을 높은 완성도로 헤쳐나간 수작(秀作)임에 틀림없다. 감독은 “‘1987’은 "반드시 만들어야 할 영화였다”고 말했다. 이젠 관객이 어떻게 응답할까가 남았다. 27일 개봉.
 
이은주 문화선임기자 jule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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