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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유석 판사의 일상有感] 인문학적 상상력은 어쩌면 인류의 마지막 생명줄

중앙일보 2017.12.12 01:51 종합 36면 지면보기
문유석 판사·『개인주의자 선언』 저자

문유석 판사·『개인주의자 선언』 저자

재판을 하다 보면 가끔 굉장히 긴 시간의 프레임 속에서 세상을 바라보게 되기도 한다. 서구의 법체계라는 것이 로마법이나 게르만법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오래된 지혜에서 비롯된 것이기 때문이다. 그중 하나가 유류분(遺留分)이다. 유언 공증만 해 놓으면 재산을 제일 이쁜 자식 한 명에게 몰아주고 나머지 자식들에게는 한 푼도 물려주지 않을 수 있을까? 그렇게는 안 된다. 최소한 법정상속분의 절반까지는 모든 자식이 상속받을 수 있도록 법이 보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유류분이다. 실제로 법원에는 유류분을 침해당했다며 반환을 청구하는 형제자매 간 소송이 많다.
 
유류분의 기원은 로마법에 있다. 로마는 포에니전쟁 승리 후 세계를 무대로 교역하는 상업 국가로 변모했고, 이에 따라 거래 및 재산 처분에 있어 개인의 자유를 보장하는 쪽으로 발전했다. 문제는 부작용이다. 공화정 말기에는 유언 자유의 원칙이 남용돼 상속을 받지 못한 배우자와 자녀들이 길거리를 전전하는 문제까지 생겨났다. 이렇게 되자 로마인들은 법정상속분의 4분의 1까지는 반드시 주도록 하는 의무분(portio legitima) 제도를 만들어 낸 것이다.
 
일상有感 12/12

일상有感 12/12

2000년 전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미래 때문이다. 알파고 이후 바둑 기사들의 운명을 보며 다들 직업의 미래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인류 중 대부분은 잉여인력으로 전락하는 것이 아니냐는 공포다. 물론 이는 괴담 수준의 억측이라며 일축하는 전문가도 많다. 하지만 수명 500세를 꿈꾸며 생명 연장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구글이나 유통 구조를 넘어 시장 자체를 새로 창조하고 있는 것 아닌가 싶은 아마존의 젊은 리더들을 보다 보면, 솔직히 이들의 눈에 내가 동등한 인간으로 보이기는 할까 싶다. 생산성 측면에서 극소수의 인간이 나머지 인류 전체를 합친 것보다 더 중요한 시대가 오고 있다. 인류의 일원으로 태어났다는 것만으로도 모든 인간에게 인류 문명의 성과에 대해 최소한의 유류분은 보장돼야 한다는 주장, 로마제국의 시민권을 참조하여 인공지능 안드로이드보다 인간의 권리를 보장해야 한다는 주장이 미래의 인권선언이자 헌법이 될 수도 있다. 인문학적 상상력이란 어쩌면 인류의 마지막 생명줄일지도 모르겠다. 주말엔 애들 데리고 서점에 가 보련다.
 
문유석 판사·『개인주의자 선언』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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