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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추억대로, 현실은 현실대로 아름다운 거죠

중앙선데이 2017.12.10 02:00 561호 16면 지면보기
1980~90년대 대중의 감성을 지배했던 작곡가 이영훈의 노래들이 뮤지컬 ‘광화문 연가’(15일~2018년 1월 14일 세종문화회관 대극장)로 부활한다. 2011년 고인이 직접 기획한 동명 뮤지컬이 나온 적 있지만 기억 속에 묻혀졌다가 이번에 서울시뮤지컬단과 CJ E&M의 최초 공동제작으로 리모델링된 작품이다. 안재욱·이건명·차지연·박강현·성규 등 호화캐스팅도 화제다. 

뮤지컬 ‘광화문 연가’ 주연 정성화

 
그런데 전작의 이지나 연출이 다시 연출을 맡았고, 죽음을 앞둔 남성이 첫사랑의 기억을 들춰보는 큰 줄기도 같다. 결정적으로 이영훈의 노래가 영원불변이다. 얼마나 새로울 수 있을까? 
 
차별화의 키를 쥐고 있는 것이 고선웅 작가의 가세로 탄생한 판타지 캐릭터 ‘월하’다. 주인공의 시간여행 안내자이자 극 전체의 서사를 이끌며 관객과도 소통하는 초월적 존재로 맹활약할 정성화(42)에게 업그레이드된 ‘광화문 연가’의 관전 포인트를 미리 물었다. 

 
임종을 앞둔 중년의 명우는 첫사랑의 추억 속으로 시간여행을 떠난다. 그 여행을 아름답게 수놓는 게 이영훈의 노래다. 어쩌면 그의 노래들은 중장년 세대에게 추억 그 자체다. ‘별밤세대’인 정성화에게도 그랬단다. “초딩 때 혼자 좋아하는 여학생이 있었어요. 중1 때 수영장에서 우연히 그 친구를 마주쳤죠. 아무 말도 못하고 돌아서는데 마침 듣고 있던 마이마이 카세트에서 ‘할 말을 하지 못했죠’가 흘러나오는 거예요. 그날은 그 노래를 무한반복해서 들었던 기억이 나요. 근데 이번에 새삼 이영훈을 재발견하는 느낌이에요. ‘기억이란 사랑보다’ ‘서로가’ 같이 잘 모르던 곡들도 나이 먹고 들어보니 이렇게 주옥같은 노래들을 그냥 지나보냈구나 싶어요.”
 
3500살 먹은 월하는 대체 정체가 뭔가요. 
“명우의 기억으로 이뤄지는 공연인데, 죽기 전에 어떤 걸 기억할까 안내해주는 역할이죠. 기억이란 이쪽 저쪽으로 흘러갈 수 있는 건데, 월하가 프로그램의 MC처럼 부드럽게 매만져 주고 평가까지 해주죠. 캐릭터적으로는 영화 ‘브루스 올마이티’의 모건 프리먼 같은 신의 모습을 빌렸는데, 개구쟁이 같으면서 코믹하고 따뜻한 느낌으로 잡았습니다.” 
 
월하에게 ‘광화문 연가’ 업그레이드의 책임이 막중한데.
“굉장히 재밌어요. 극 자체를 쥐락펴락할 수 있거든요. 별것 아닌데 월하가 긴장감 조성해서 관객을 빨아들이는 순간들이 많고, 그걸 잘 살려야겠다 싶어요. 예컨대 ‘휘파람’이 발라드 곡이고 헤어짐이나 쓸쓸함을 이야기하고 있지만, 그걸 전혀 다른 느낌으로 비틀어볼 수 있죠. 이영훈 음악이 이런 식으로 쓰여지는 것도 좋은 선택인 것 같아요.” 
 
코믹과 진지 사이 줄타기를 잘해야 할 것 같은데요. 
“마냥 웃기기만 해서는 극을 흩뜨리게 되니 스토리 흐름을 잡아가야죠. 단순히 정성화가 가진 개인기로 웃기려 한다면 관객이 극에서 빠져나오게 되요. 극 속에 녹아서 뭔가 해보려 할 때 관객도 인정하며 웃어주는 거죠. 그 부분을 심사숙고 하면서 캐릭터를 만들고 있어요.”  
 
‘절친’ 안재욱과의 시너지 기대
‘기억 소환, 추억 정산’. 뮤지컬 ‘광화문 연가’의 모토다. 월하의 역할도 명우에게 흐릿해진 기억들을 똑바로 마주보고 추억을 재구성하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그런 초월적 캐릭터이다 보니 이영훈의 애잔하고 낭만적인 곡들은 그의 몫이 아니다. 드라마를 이어주는 콘서트 형식으로 주로 빠른 노래를 담당하고 오랜만에 춤실력까지 보여준단다. 
 
“워낙 춤이 잼병이라 엄청 땀흘리는 중입니다.(웃음) 근데 유일하게 아쉬운 게 발라드를 안 불러요. 추억 관련 노래는 다 명우가 소유하고, 제3자적 입장인 월하는 빠른 곡을 불러요. ‘이 세상 살아가다 보면’ ‘깊은 밤을 날아서’ 같은 곡들이죠. 극 속에 존재하는 노래가 아니라 관객과 명우를 이어주고, 관객을 참여시키는 부분이죠. 1막 엔딩 ‘그녀의 웃음소리뿐’ 전체 합창 중에 제 솔로 파트가 있는데, 그 부분이 가장 인상적이지 않을까 싶어요.”
 
죽기 직전에 첫사랑을 회상하는 내용인데, 과연 그럴까요.
“가장 좋았던 시절이 생각나겠죠. 그게 명우에게는 첫사랑이었나 봐요. 근데 단순히 첫사랑에 대한 미련은 아니에요. 이지나 연출님이 여자 마음에 민감하시거든요. ‘먼 추억은 먼 추억대로 기억하게, 가까운 것은 가까운 대로 기억하게’란 대사가 있는데, 사람의 추억이란 게 어차피 편집된 것이쟎아요. 아름답게만 추억했던 첫사랑을 나이들어 만나면 깜짝 놀라곤 하죠.(웃음) 명우는 월하와의 대화를 통해 삶의 기억을 합리적으로 선택하고 마무리짓게 되는데, 그래서 그 뒷모습이 슬프면서도 흐뭇한, 굉장히 짠한 느낌을 줘요. 죽는 게 저런 것인가 생각해 보게도 하구요.” 
 
고선웅식 ‘애이불비(哀而不悲)’가 살아있네요.
“덕분에 작품이 철학적으로 업그레이드됐어요. ‘삶은 난제였으나 죽음은 축제라’라는 대사를 좋아하는데, 마냥 옛사랑 찾아 헤매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과 죽음에 대해 생각해볼 명제를 던져주죠. 중간에 기형도 시인의 시들을 읊으며 공감을 이끌어내기도 해요. ‘난 평생 사랑을 찾아 헤매었으나 스스로를 사랑하지 않았노라’ 이런 거죠. 그런 걸 즐겁고 재밌게 이끌어내야 하기에 월하가 중요한 역할이에요.”
 
대학 선배 안재욱과는 처음으로 호흡을 맞추게 됐다. 개그서클 출신에 절친인 두 사람이 서로 눈빛만 봐도 타고난 예능감을 주체 못하는 것 아닐까 걱정도 된다. “중년의 명우는 죽어가다 보니 직접 웃음을 던지기엔 무리수가 있죠. 그를 이용해서 제가 웃겨야죠. 그러려면 명우가 대사를 타이밍 좋게 잘 쳐줘야 하는데, 워낙 재밌는 형이라 아이디어까지 줍니다. 20여 년전 어렵던 시절, 김생민 형과 저를 거둬 먹여주던 형이거든요. 형 집앞 포장마차에서 살다시피 하며 바쁜 형을 기다리곤 했죠. 팬들이 준 선물을 얻어가기도 하고, 딱 거지였어요.(웃음) 한 무대 같이 서기는 처음이라 서로 너무 즐겁고, 시너지가 좋아서 기대가 커요.” 
 
옛날 노래로 만든 주크박스 뮤지컬이지만 뻔한 복고풍은 아니란다. “이영훈의 노래를 색다르게 들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는 게 그의 말이다. “클래시컬하게, 때론 현대적으로 모든 곡이 새롭게 편곡되거든요. 관객들이 예전 향수는 물론 새로운 느낌까지 받을 수 있을 겁니다. 추억을 상기시킨다기보다는 또 다른 질문 던지고 스스로 답 내릴 기회 주는 작품이죠. ‘추억 정산’ 뮤지컬이잖아요. 그 안에 복고는 없습니다.”
 

 
글 유주현 객원기자 yjjoo@joongang.co.kr 사진 박종근기자·CJ 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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