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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들어 늘어난 말수

중앙선데이 2017.12.10 01:00 561호 29면 지면보기
공감 共感
내가 쓴 글자가 저렇게 큰 화면을 통해 보이니 또다른 감동이 있었다.

내가 쓴 글자가 저렇게 큰 화면을 통해 보이니 또다른 감동이 있었다.

한번 아프고 나니 확실히 병원을 자주 간다. 석 달에 한 번은 병원에 가서 정기검진을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특히 이번에는 종합검진이어서 4명의 의사를 만나 7개 항목의 테스트를 통과해야 했다. 하루 만에 모든 검진을 받기에는 시간이 너무 빠듯할 것 같아 아예 하룻밤 입원을 하기로 했다. 그 편이 더 마음도 편할 것 같았다. 홍콩 잡지 ‘명보주간(明報周刊)’에서도 인터뷰를 위해 와 있는 상황이었다. 입원 준비를 하다 보니 일정 조정이 어려워 수속 세 시간 전에야 병원 근처 식당에서 인터뷰를 진행하게 됐다. 지난해 발병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건강 및 심리 회복 과정이 주요 내용이었다.
 
사실 지난 1년간 나에 관한 뉴스는 모두 건강과 떼려야 뗄 수 없는 상황이었다. 모두가 내가 암 투병을 했다는 사실을 알기에 예술 창작 활동에 대해 논하기는 여의치 않았기 때문이다. 이미 습관이 된 나는 긍정 에너지를 내뿜으며 즐겁게 임했다. 나는 심리 상태가 암세포 활성화 및 촉진 가능성이 있음을 강조했다. 의학적으로 증명하긴 힘들겠지만 심리 기복은 분명 발병과 연관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솔직하게 인정했다. 지난 몇 년간 극심한 스트레스와 근심 걱정에 시달리고 있었노라고.
 
일생을 순탄하게 보내 온 천추샤가, 매일 웃는 얼굴만 보여 주던 그녀가 그렇게 큰 아픔이 있다고? 취재 온 기자는 긴장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혹여 내가 심경 고백이라도 할까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웃으며 “이것은 가정과 회사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에 과도한 관심을 가진 후유증이자 부작용 같은 것”이라고 말하자 이내 긴장이 풀어졌다. 다행인 것은 실제 병마와 맞서 싸우다 보니 마음의 병은 점차 사라져 갔다는 것이다.  
 
원래 예정된 인터뷰 시간은 90분이었지만 우리는 3시간 동안 대화를 나눴다. 하마터면 입원 수속 시간도 놓칠 뻔했다. 듣자 하니 취재기자 역시 녹음을 다시 듣느라 며칠 밤을 제대로 자지 못한다고 했다. 대체 나는 언제부터 이렇게 달변가가 된 걸까. 사실 어렸을 땐 내성적인 편이었다. 엄마는 내가 말수가 너무 적다며 원망하곤 했었다. 엄마에게 속을 털어놓는 일이 거의 없었기 때문이다. 무표정한 얼굴을 놀리기 위해 ‘천바이완(陳百萬)’이라고 부르기도 했다. 마치 내가 엄마에게 100만 홍콩 달러(약 1억4000만원)를 빚지기라도 한 듯 농담을 건네는 것이다.
 
하지만 나이를 먹으면서 사람은 정말 변하는구나라고 느낄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렇게 내성적이었던 아이가 친구들과 수다 떠는 걸 가장 좋아하게 되다니, 심지어 모일 때마다 꺼내는 화제도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다. 한번은 서울에서 대기업 회장과 점심식사를 함께한 적이 있는데 그때도 식사를 마치고 나니 오후 3시였다.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서 이야기꽃을 피우다 보니 시간 가는 줄도 모른 것이다. 나중에서야 그날 오후에 회장이 주재하는 회의가 있었다는 사실을 알았다.  
 
지난 주말에는 연사로 강단에 올랐다. 무대가 내게 낯선 공간은 아니지만 가수로 공연을 하는 것과 90분간 강의를 하는 것은 완전히 다른 일이었다. 더구나 나는 첫 공개 강연을 하는 ‘신인’이기에 원고를 준비하고 자료를 숙지하면서 청중의 반응을 살피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았다. 원래는 내 능력 밖의 일이라 생각해 망설였지만 아이들의 지지에 힘입어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엄마는 언제 어디서나 원고도 없이 3시간 동안 말할 수 있는 사람이잖아, 90분 강연쯤이야 식은 죽 먹기”라니 칭찬인지 욕인지 모르겠지만 말이다.
 
500여 관중이 보내 준 뜨거운 함성과 박수는 큰 수확이었다. 마음을 다스리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다음에도 강연 제안이 오면 받아들여야 하나. 사실 작년에 한양대 서원남 교수가 중문과 학생들을 대상으로 공개 강의를 하면 어떻겠냐고 물어본 적이 있다. 당시엔 건강 문제도 있었지만 줄곧 제대로 답변을 못하고 있는 상태였다. 이제 경험도 있고, 자신감도 생겼으니 내친김에 도전해 볼까. 가만 있자, 벚꽃 피는 봄에 한국에 가려면 지금부터 석 달은 남았다. 그동안 원고를 준비한다 치면 역시 강연은 3시간 해야 하나. 후후.
 
 
천추샤 (陳秋霞·진추하)
라이언팍슨 파운데이션 주석
onesummernight7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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