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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당에 뒷 돈 댄 김진형 총재 등 6명 수감

중앙선데이 2017.12.10 00:37 561호 21면 지면보기
[중앙은행 오디세이] 3·15 부정선거로 쑥대밭 된 한국은행
1960년 7월 5일 열린 3·15부정선거 관련 첫 공판. 부정선거 자금조달 혐의로 구속된 송인상 재무장관(흰옷을 입은 피고인들 가운데 앞줄 오른쪽 둘째), 김진형 한국은행 총재(넷째 줄 맨 왼쪽)등이 보인다.

1960년 7월 5일 열린 3·15부정선거 관련 첫 공판. 부정선거 자금조달 혐의로 구속된 송인상 재무장관(흰옷을 입은 피고인들 가운데 앞줄 오른쪽 둘째), 김진형 한국은행 총재(넷째 줄 맨 왼쪽)등이 보인다.

요즘에는 ‘유시민의 항소이유서’가 유명하지만, 과거에는 1960년 4월 19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발표한 시국선언문이 명문장으로 통했다. 세상을 바꾼 그 선언문은 차갑게 시작한다. “상아의 진리탑을 박차고 거리에 나선 우리는 질풍과 같은 역사의 조류에 자신을 참여시킴으로써 이성과 진리, 그리고 자유의 대학 정신을 현실의 참담한 박토(薄土)에 뿌리려 하는 바이다.” 그러나 그 끝은 뜨겁다. “보라! 현실의 뒷골목에서 용기 없는 자학을 되씹는 자까지 우리의 대열을 따른다. 나가자! 자유의 비밀은 용기일 뿐이다.”
 
4·19 혁명은 그 선언문처럼 차가움으로 시작해서 뜨거움으로 완성되었다. 1958년 5월 치러진 제3대 민의원 선거에서 민심 이반을 확인한 자유당은 그 원인을 야당과 언론의 여론조작 탓으로 돌렸다. 그래서 반대세력에게 재갈을 물리기로 했다. 그해 12월 국가보안법을 전면 개정해 이적행위의 범위를 대폭 넓히고, 이듬해 4월에는 비판적 성향의 경향신문을 폐간했다. 그때 언론은 겁이 나서 침묵했고, 국민들은 민주주의를 체념했다(국가보안법은 4·19 혁명 이후 원점으로 돌아왔다).
 
1959년 3월 단행된 개각은 이듬해의 정·부통령 선거를 염두에 둔 포석이었다. 내무장관에 임명된 최인규는 1년 내내 전국을 돌아다니며 공개적으로 “차기 선거에서 자유당 입후보자가 당선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공무원의 도리”라는 취지로 훈시를 하면서 뒤로는 부정선거를 기획했다. 미국 뉴욕대에서 경제학을 전공한 사람답지 않게 무모한 방법들을 서슴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치러진 1960년 3월 15일의 선거에서 이승만과 이기붕이 각각 대통령과 부통령으로 당선되는 것을 본 유권자들은 다시 한번 절망했다.
 
박마리아의 비망록, 부정청탁의 스모킹 건
4·19 혁명 당시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고 있다. 4월 19일부터는 교수와 직장인까지 시위에 참여했다.

4·19 혁명 당시 경찰이 시위대를 진압하고 있다. 4월 19일부터는 교수와 직장인까지 시위에 참여했다.

그러나 정작 투표권이 없는 학생들은 가만히 있지 못했다. 선거 이튿날부터 경남 지역 고등학생들의 부정선거 규탄시위가 이어졌다. 개정된 국가보안법 탓에 그 시위는 한동안 보도되지 않았다. 그러다가 4월 11일 엄청난 사건이 터졌다. 20여 일 전 시위에 참가했다가 실종된 고등학생 김주열군(당시 17세)의 주검이 마산 앞바다에서 떠오른 것이다. 그의 얼굴에는 시위 진압용 최루탄이 눈에서 뒤통수까지 관통하고 있었다. 시위가 어느 정도였으며 그 진압이 얼마나 잔인했는지 생생히 말해 주고 있었다.
 
그 한 장의 사진은 전국을 뜨겁게 달구기에 충분했다. 최인규가 적색분자의 획책이라고 강변했지만, 전국으로 번지는 불길을 막기에는 늦었다. 거기에 더해진 서울대학생들의 선언문은 관망하던 교수와 직장인까지 마침내 궐기하는 전환점이 됐다. 거리는 시위 인파로 덮였고, 경찰의 발포가 뒤따랐다. 유혈혁명이 시작된 것이다. 결국 민초들이 승리하고,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이 하야를 선언했다.
 
이틀 뒤 경무대에서 또 다른 총성이 들렸다. 이기붕의 아들 이강석이 대통령 비서실 사무실에 대피해 있던 가족들을 권총으로 쏘고 자살한 것이다. 이승만 대통령의 양아들이기도 했던 이강석은 권력서열 1, 2위를 등에 업은 무소불위 권력의 상징이었다. 그와 외모가 비슷한 사기꾼이 지방을 순회하면서 지역 유지들에게 금품을 갈취하는, 소위 ‘가짜 이강석 소동’이 벌어질 정도였다.
 
이기붕 일가가 몰락한 뒤 사람들이 그의 집(오늘날 4·19 혁명 기념도서관)으로 몰려갔다. 한때 ‘서대문 경무대’로 불리던 그곳에서 기이한 장부가 나왔다. 그 집의 안주인인 박마리아가 정치인, 장·차관, 은행장, 대학 총장, 군 장성, 그리고 그 자리를 노리는 사람들과 그 부인들을 만났을 때 적은 기록이었다.
 
박마리아는 박근혜 전 대통령의 비서들처럼 아주 꼼꼼했다. 자신이 만난 사람과 날짜, 그리고 그들이 두고 간 물건을 빠짐없이 적었다. 갈비와 비단은 물론 난초, 이불, 방석, 한지, 수박, 깨소금, 배추, 맥주, 미제 과자와 서독제 ‘씨날코(청량음료)’까지 적혀 있었다. 권력서열 2위를 향한 50년대식 청탁과 줄 대기의 생생하고 참담한 기록을 보며 사람들은 혀를 찼고, 그 ‘뇌물일기’에 자주 등장하는 사회지도층 인사들은 부끄러워서 한동안 몸을 숨겼다.
 
산은 연계자금으로 대기업 불법 지원
대통령도 숨을 곳을 찾았다. 혁명 이후 이화장에서 칩거하던 노쇠한 대통령은 5월 29일 새벽 도망치듯 하와이로 망명했다. 이제 하수인들만 남았다. 그들 중 누군가는 부정선거와 시민들의 희생에 책임을 져야했다. 국무위원과 자유당 간부들이 책임지는 것은 당연했다. 시민들을 벌벌 떨게 한 신도환·이정재·임화수·유지광 등 정치깡패들도 구속됐다.
 
금융계도 심판의 대상이었다. 자유당과 재무장관은 시중은행에 압력을 넣어 산업은행채권을 담보로 대기업에게 대출토록 했고, 대기업은 그렇게 받은 대출금의 10~20%를 자유당에 바쳤다. 여기에는 한국은행도 관계됐다. ‘산업은행 연계자금’이라고 불리던 공공연한 적폐를 독려하고 점검했으며, 때로는 산업은행에 직접 돈을 풀기도 했기 때문이다.
 
1심에서 총재 김진형은 징역 12년, 수석부총재 배제인은 10년을 각각 선고 받았다. 배제인이 수석부총재로 일한 기간은 겨우 열흘에 불과했다. 이밖에 재무장관 송인상(전 한은 부총재) 15년, 상공장관 김영찬(전 한은 수석부총재) 12년, 전임 상공장관 구용서(전 한은 총재) 10년, 산은 총재 김영휘(전 한은 수석부총재) 10년의 선고가 내려졌다. 전부 한국은행 임원 출신이었다.
 
승진 누락 전예용은 장관 발탁 새옹지마
박마리아의 ‘뇌물일기’에 따르면 1959년 초 국무위원(송인상·신현확·최인규·김일환), 군 장성(장도영·백인엽), 기업인(정주영·김성곤) 뿐만 아니라 한은 임원(김진형·전예용)과 정치깡패(임화수)까지 이기붕에게 신년인사를 했다. [국가기록원, 중앙포토]

박마리아의 ‘뇌물일기’에 따르면 1959년 초 국무위원(송인상·신현확·최인규·김일환), 군 장성(장도영·백인엽), 기업인(정주영·김성곤) 뿐만 아니라 한은 임원(김진형·전예용)과 정치깡패(임화수)까지 이기붕에게 신년인사를 했다. [국가기록원, 중앙포토]

그나마 금융통화위원회 위원(금통위원)들은 무사했다. 금통위원이 불법행위나 중대한 과실을 저질러 한국은행에 손해를 끼치면 검찰총장이 손해배상소송을 제기토록 한 당시 한은법(제21조)을 의식한 탓이다. 1958년 7월 3일 김진형 총재가 산업은행 연계자금 규모를 무제한으로 넓히겠다는 의안을 제출했을 때 금통위원들은 맹렬히 반대했다. 분위기에 압도된 김진형 총재가 현장에서 의안을 철회할 정도였다. 그것은 자유당과 독선적 총재를 향한 금통위 최초의 반란이었다.
 
금통위원 박숙희(금융기관 선출)는 지옥과 천당을 오갔다. 그는 현직 농업은행장으로서 대통령 선거 전 직원 400명을 강당에 모아 놓고 이승만·이기붕 지지를 훈시했다. 금통위원은 국가공무원의 신분(당시 한은법 제8조)이라 그것은 결코 가벼운 죄가 아니었다. 법정에 선 박숙희는 산업은행 연계자금에 직접 관계된 다른 시중은행장들을 놔두고 자기만 처벌받는다며 흐느꼈다. 그런데 재판 도중 내각제 개헌이 발효되어 ‘대통령·부통령 선거법’이 자동 폐기되고 그 법을 위반한 사람의 처벌 근거도 사라졌다. 당황한 민주당 정부가 ‘반민주 행위자’를 소급 처벌할 수 있도록 헌법을 다시 개정(1960년 11월)했으나 그 사이에 혁명의 피로감이 커졌다. ‘정치보복’을 자제하라는 반동의 움직임 속에서 박숙희는 슬그머니 불기소됐다.
 
1985년 4월 감방에서 항소이유서를 쓴 유시민은 훗날 보건복지부 장관이 됐다. 1960년 4월 하숙방에서 시국선언문을 쓴 서울대 정치학과 3학년생 이수정은 훗날 문화부 장관이 됐다. 그러나 밀실에서 산업은행 연계자금 대출서류를 쓴 전·현직 한국은행 임원 6인은 훗날 죄수가 됐다.
 
반면 3년 전 이기붕이 한은 총재직을 제의했을 때 점잖게 거절했던 김교철 한국무진회사(국민은행의 전신) 사장은 무사했다. 혁명 열흘 전 수석부총재 승진에 실패해 낙담하던 전예용도 화를 피했다. 한은 부총재(오늘날 부총재보) 전예용은 혁명 뒤 찾아 온 인적 청산과 인재난 속에서 곧 부흥부 장관으로 임명되는 경사까지 겹쳤다. 혁명이 가져 온 새옹지마였다.
 
전예용은 새 시대에 무임승차했지만, 부정선거 자금조달에 휩쓸린 한국은행은 풍비박산났다. 그것은 김진형 총재가 자초한 불행이었다. 40년 전 조선은행은 일본 여당과 정부의 지시에 따라 만주 지역에서 돈을 마구 풀었다가 부실화되어 자본금 50% 감액 사태와 혹독한 구조조정을 겪었다(2015년 4월 19일자 참조). 조선은행을 정부의 부속물이라고 믿었던 쇼다 가즈에(勝田主計) 총재가 초래한 시련이었다. 한국은행은 그런 일이 없도록 미국식 중앙은행 제도를 수입해 독립성을 크게 높였건만, 김진형 총재는 스스로 그 독립성을 걷어차고 행정부에 붙었다. 쇼다처럼 차기 재무 장관을 노렸던 욕심 탓이다.
 
중앙은행의 독립성을 완성하는 것은 결국 사람이다. 그래서 한국은행은 인적청산이 필요했다. 10년 전 창립할 때처럼 금통위원 전원이 새로 임명됐다. 임원들도 바뀌었다. 신임 총재는 오래전 한국을 떠났던 하와이 교포였다. 과거가 깨끗한 사람을 발굴하는 것, 그것이 한국은행판 ‘과거사 정리’였다.
 
 
차현진 한국은행 금융결제국장 hyeonjin.cha@bok.or.kr
서울대 사회과학대학과 미국 펜실베이니아대 경영대학원을 졸업했다. 올해로 33년째 한국은행에 근무 중이다. 『애고니스트의 중앙은행론』『숫자없는 경제학』『금융 오디세이』 등 금융 관련 다수 저서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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