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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유 매장 1위 베네수엘라 디폴트 위기가 주는 교훈

중앙선데이 2017.12.10 00:19 561호 2면 지면보기
사설
세계 최대 석유 매장량을 자랑하는 남미 베네수엘라가 국가부도(디폴트·채무불이행) 사태 위기를 맞고 있다. 스탠더드앤드푸어스(S&P)와 피치 등 국제신용평가회사들은 잇따라 베네수엘라의 디폴트 가능성을 경고했다. 한때 오일머니로 호령했던 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에 이르게 됐을까.
 
최근 뉴욕타임스(NYT)는 ‘21세기 국가사회주의’를 지향하는 베네수엘라의 현주소를 소개했다. 저명한 문학평론가로서 애서가(愛書家)인 산도발 교수는 더 이상 책을 살 여력이 없다. 경제위기가 갈수록 깊어지면서 살인적인 인플레와 볼리바르 화폐의 가치 폭락, 식량이나 의약품 등 기초 생필품의 부족으로 먹고살기도 어려운 판에 책을 사는 것은 언감생심 꿈꾸기도 어려운 지경이다. 아들과 노모를 부양하는 베아트리스는 기초생활비도 벌지 못해 “의약품이 먼저냐, 식량이 먼저냐를 선택해야 할 정도”라고 말한다. 식사는 하루 한 끼로 줄였다. “거짓말 같지만 사실이다. 사는 게 문제가 아니라 생존이 문제다.”
 
베네수엘라가 총체적으로 그로기 상태에 빠졌다. 총 부채는 1500억 달러인데 외환보유액은 100억 달러도 채 되지 않는다. 올 들어 지난 10월까지 물가상승률은 800%. 국제통화기금(IMF)은 내년엔 인플레율이 2300%를 기록할 것으로 예측했다. 볼리바르 화폐 환율은 암시장에서 달러당 10만을 넘어섰다. 한 달 전의 배이며 연초보다 무려 33배 올랐다. 거리에서는 쓰레기통을 뒤지는 사람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위기에 대한 원인 분석은 다양하다. 니콜라스 마두로 정부는 중남미 사회주의 세력을 약화시키기 위한 미국 제국주의의 음모 탓으로 돌리고 있다. 마두로 대통령은 지난달 2일 “미국의 금융제재 때문에 새 자금 조달 길이 막혔다”고 비판했다. 미국은 지난 8월 마두로 정부가 초헌법적인 제헌의회를 만든 직후 베네수엘라에 강력한 금융제재를 가했다.
 
그러나 미국 탓으로만 돌리기에는 설득력이 부족하다. 마두로 대통령의 전임자인 우고 차베스가 현재 위기의 근본 원인을 제공했다고 봐야 한다. 차베스 전 대통령은 14년 재임 기간 ‘퍼주기식 포퓰리즘’의 진수를 보여줬다. 배럴당 100달러가 넘던 고유가에 힘입어 원유 수출로 벌어들인 막대한 오일머니를 무상 교육, 무상 의료, 무상·저가 주택 보급 등 각종 선심 정책에 쏟아부었다.
 
차베스가 후계자로 지명한 마두로 대통령은 2014년 취임과 동시에 유가 급락으로 인한 경제 위기의 직격탄을 맞았다. 그런데도 차베스 시절의 가격 통제와 민영기업 국유화를 계속 밀어붙였다. 자연히 생산품은 더 줄어들고 상점 앞의 대기 줄은 더욱 길어졌다. 2013년에 비해 올해 국내총생산(GDP)은 35%나 줄었다. 국민의 80%가 절대빈곤층이다. 더 이상 ‘무상 시리즈 복지’를 펼 여력이 없는데도 마두로 대통령은 여전히 포퓰리즘 정책을 남발하고 있다.
 
정치적 혼란은 더욱 가중되고 있다. 2015년 총선에 야권 연합이 개헌선인 3분의 2 의석을 차지했으나 마두로 측은 대법원 판사들을 ‘동원’해 여소야대 의회의 활동을 정지시켜 버렸다. 대신 초헌법적인 제헌의회를 급조해 정적 제거, 반정부 시위 세력 분쇄 등에 앞장서게 하고 있다. 마두로 대통령의 지지율은 23%에 불과하다. 유혈시위는 그칠 날이 없다.
 
유가가 다시 급격히 오른다면 베네수엘라의 사정은 지금보다 나아질 수는 있다. 유가만 하염없이 쳐다봐야 하는 베네수엘라의 사정이 딱하다.
 
덩샤오핑은 흑묘백묘라고 했다. 사회주의든 자본주의든 어떤 이념과 체제라도 국민이 따뜻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게 하는 것이라면 문제없다. 올해는 러시아 혁명 100주년이다. 차베스가 21세기 국가사회주의를 주창한 지 10년째 되는 해이기도 하다. 베네수엘라는 하루빨리 국민을 잘살게 하는 ‘실용적 이데올로기’로 전환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흔히 과거 우리보다 훨씬 잘살다가 추락한 남미 국가들 이야기를 하곤 한다. 베네수엘라에서 보듯이 이제 그런 사례는 그냥 과거만의 일이 아니다. 살아 있는 현재진행형 역사다. 역사에서 교훈을 배우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우리는 그런 전철을 밟지 말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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