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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취 상태 인정 제한적, 폐지 땐 억울한 피해자 나올 수도

중앙선데이 2017.12.10 00:18 561호 7면 지면보기
폐지 청원 21만 명 ‘주취 감경’ 논란
일러스트=강일구 ilgook@hanmail.net

일러스트=강일구 ilgook@hanmail.net

‘판사가 피고인에게 술을 먹였다’. 엉뚱한 말 같지만 변호사 업계에서 10여 년 전만 해도 실제 자주 사용됐던 은어다. 통상 선처해 줄 필요성이 큰 피고인에게 재판장이 음주 여부를 묻고 이를 근거로 형을 깎아 줬던 상황을 농담 삼아 언급할 때 쓰였던 말이다. 2000년대 초만 해도 술 마신 상태에서 저지른 잘못에 대해 지금보다 상대적으로 너그러웠던 사회 분위기에 따라 법관들도 법정에서 ‘주취(酒醉) 감경’을 심심찮게 적용했었다. 하지만 2009년 조두순, 2012년 오원춘 등 흉악범죄를 저지른 이들에 대해서도 이 조항이 적용되면서 논란이 커졌다. 음주에서 비롯된 범죄가 많아져 사회적 관용의 범위도 좁아졌다. 대검찰청에 따르면 살인 혐의로 기소된 피의자 중 34.9%(2015년 기준)가 술에 취한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 성폭력(30.4%), 폭행(26.4%), 상해(42.2%) 등 다른 강력범죄에서도 주취 범죄 비율은 높게 나온다.

음주 따른 강력범죄 다수 발생
법정서 적용되는 사례 확 줄어
단순히 ‘기억 안 난다’ 적용 배제
누가 봐도 인정할 증거·증언 필요

법정형 높은 범죄의 애매한 사건
'장발장' 같은 사례 나올 수도

 
상황이 이렇다 보니 실제 법정에서 이 조항이 적용되는 일은 점차 줄어들었다. 아예 성범죄에 대해선 주취 감경할 수 없도록 법도 바뀌었다. 최근에는 이 조항을 폐지하자는 국민청원에 한 달 사이 21만여 명의 국민이 참여하기도 했다. “술 마신 상태였다고 똑같은 범죄를 저질렀는데도 봐준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된다”는 청원 제기자의 주장이 공감을 얻고 있기 때문이다. 급기야 지난 6일에는 조국 청와대 민정수석이 “신중한 논의가 필요하다”며 상황 진화에 나섰다. 하지만 국회에 여러 건의 관련 법안이 제출돼 있어 여전히 불씨는 살아 있는 상태다. 주취 감경은 정말 없어져야 할 악법(惡法)인 것일까.
 
“술 마셨으니 선처” 99% 안 받아들여
법상 주취 감경을 명확히 규정한 조항은 없다. 다만 형법 10조 2항에 “심신(心身)장애로 사물을 변별하거나 의사를 결정할 능력이 미약한 경우에는 형을 감경한다”고만 돼 있다. 법원은 실무적으로 만취 상태의 피의자에게도 심신미약 상태가 있을 수 있다 보고 이를 적용해왔다.
 
하지만 최근 들어선 주요 범죄 양형기준에서 주취 감경이 빠지면서 거의 적용되지 않는 분위기다. 수도권 소재 법원 형사재판부의 한 판사는 “‘술 마셔서 그런 거니 선처해 달라’는 주장의 99%는 받아들이지 않는다.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은 단순히 ‘필름이 끊겼다’ ‘기억이 안 난다’ 정도가 아니다. 정말 자기 아버지도 몰라볼 정도로 누가 봐도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고 이를 입증할 증거가 있는 경우에 한해 극히 제한적으로만 적용한다”고 설명했다.
 
실제 중앙SUNDAY가 법원도서관 판결정보검색 시스템에서 최근 3개월간의 형사 판결을 검색한 결과 음주로 인한 심신미약이 인정된 경우는 10건이 채 되지 않았다. 대부분 만취상태를 보여주는 영상자료나 확실한 증언이 있는 경우다. 지난 8월 강도상해죄로 기소된 정모(39)씨 사례가 그렇다. 그는 대구 시내의 한 식당에서 술을 마시다 만취한 상태에서 식당 앞에 주차된 차 문이 열려 있는 걸 보고 들어갔다. 이를 이상하게 여긴 차주의 지인 A씨가 자신을 끌어내려 하자 승용차 안에 있던 과도를 휘둘러 전치 2주의 상해를 입혔고 검찰은 강도상해죄를 적용해 정씨를 기소했다. 차량을 훔치려다 이를 막아선 사람에게 해를 입혔다고 본 것이다. 법정형이 무기 또는 징역 7년 이상인 터라 작량감경(판사 재량으로 여러 주변 상황을 감안해 형을 감해주는 것)을 한다 해도 최소 3년6개월의 형이 선고될 가능성이 높았다.
 
주취 폭력 성향 알면 무조건 적용 배제
상황이 달라진 것은 국민참여재판으로 진행한 공판에서였다. 법정에서 공개된 블랙박스 화면에서 정씨는 그야말로 인사불성의 행태를 보였다. 자기 혼자 자는 듯이 앉아 있다 이상한 소리를 내는 등 만취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을 보여주며 한 시간 이상 차에 머물렀다. 결국 차를 훔치려는 사람이 한 시간 넘게 차 안에 머무른 것이 말이 되느냐는 변호인 측 주장이 먹혀들면서 법정형이 징역 1년 이상 10년 이하인 특수상해로 죄명이 바뀌었다. 여기에 배심원 7명은 만장일치로 심신미약까지 인정했다. 대구지법 형사11부는 지난 10월 말 정씨에게 징역 9개월을 선고했다. 정씨를 대리한 전정호 변호사는 “술로 인한 심신미약은 거의 인정 안 되지만 정씨는 평소에 나쁜 술버릇도 없는 데다 실제 상황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증거가 있어 인정됐다”고 설명했다.
 
지난달 울산지법 형사2부에서 벌금 500만원을 선고한 장모(35)씨에게도 주취 감경이 적용됐다. 장씨는 2015년 7월 울산의 한 공원에서 열린 음악공연 도중 무대에 올라가려다 제지를 받자 이를 말리려는 보안요원과 경찰을 폭행한 혐의(폭행, 공무집행방해)로 기소됐다. 법원은 장씨가 당일 평소 주량보다 많은 소주 4병을 마신 점, 피해 경찰관이 “피고인이 너무 술에 취해 경찰관 2명이 감당하기 어려웠다”고 증언한 점, 목격자들도 “피고인이 완전히 이성을 잃어 의사소통이 전혀 되지 않았다”고 진술한 점 등을 고려해 심신미약 상태를 인정했다.
 
전문가들 사이에선 주취 감경이 이미 제한적으로 적용되는 만큼 조항 자체를 폐지할 필요까지는 없다는 의견이 많다. 검사 출신인 이창현 한국외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과거엔 부적절하게 남용된 경우도 있었지만 요즘엔 법원에서도 엄격히 보고 있는 만큼 신중하게 접근해야 한다. 강도상해죄처럼 법정형이 높은 범죄의 경우 경계선상의 애매한 사건까지 지나치게 엄격하게 법을 적용하다 보면 ‘장발장’과 같은 사례가 현실에 나올 수 있다”고 지적했다.
 
법에 이미 견제장치가 있다는 점도 신중론의 근거 중 하나다. 형법 10조 3항은 ‘위험 발생을 예견하고 자의로 심신장애를 야기한 자의 행위에는 (심신미약 감경을) 적용하지 않는다’고 규정하고 있다. 강동욱 동국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이 조항의 취지는 술 먹은 사람 봐주라는 게 아니라 의식이 불분명한 상태에서 범죄를 저질렀을 때 일반 사건에서보단 좀 더 신중하게 처벌해야 한다는 것이다. 조두순처럼 극단적인 악용 사례를 일반화해 조항 자체를 없애면 정말 억울한 선의의 피해자가 생길 수 있다”고 지적했다.
 
 
박민제 기자 letmei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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