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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비 월 20만원, 밤엔 장어집 투잡 … 절박함이 날 일으켰다

중앙선데이 2017.12.10 00:02 561호 25면 지면보기
[2017 스포츠 오디세이] 경남 FC 1부 승격 이끈 김종부 감독
경남 함안 공설운동장에서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는 김종부 감독의 얼굴에는 여유 있는 웃음이 넘쳤다. 함안=송봉근 기자, [중앙포토]

경남 함안 공설운동장에서 선수들의 훈련을 지켜보는 김종부 감독의 얼굴에는 여유 있는 웃음이 넘쳤다. 함안=송봉근 기자, [중앙포토]

1983년 6월, 대한민국은 ‘멕시코 청소년축구 4강 신화’로 뜨거웠다. 대학 1학년이었던 나는 하숙집 아줌마 방에서 내 또래 선수들의 경기를 흑백 TV로 지켜봤다. 공격수 김종부(당시 고려대 1)는 발군이었다. 브라질과의 준결승전 선제골을 포함해 결정적인 순간마다 골과 도움을 기록했다.

83년 멕시코 청소년축구 4강 주역
대우-현대 스카우트 싸움에 낙마
고교·대학·4부리그 거치며 단련

2부 강등된 경남 맡아 재기 꿈 이뤄
“시련이 사람 마음 읽을 수 있게 해
감독의 멋진 축구보다 선수가 먼저”

 
1986년 6월 6일, 멕시코 월드컵 불가리아전은 다방에서 봤던 기억이 난다. 수중전으로 치러진 경기에서 한국은 종료 직전 김종부의 골로 1-1로 비겼다. 조광래가 헤딩으로 올려 준 볼을 김종부가 가슴으로 잡아낸 뒤 오른발 터닝슛으로 골문을 갈랐다.  
 
축구담당기자를 하면서 멕시코 4강 신화 주역인 신연호(단국대 감독), 이기근(이기근FC 대표) 등과는 친구처럼 지냈다. 그런데 김종부와는 만날 기회가 없었다. 그가 사람 앞에 잘 나타나지 않아서였다.
 
김종부(52)가 실로 오랜만에 양복을 입고 화려한 조명 앞에 등장했다. 11월 20일 열린 ‘2017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였다. 그는 경남 FC를 K리그 챌린지(2부리그) 우승으로 이끌어 클래식(1부)으로 승격시켰다. 그 공로로 K리그 챌린지 감독상을 받았다.
 
김종부는 ‘비운의 축구천재’로 기억된다. 워낙 재능이 뛰어났기에 프로축구 대우와 현대의 스카우트 파동에 휘말렸다. 축구계 선배들의 자존심 싸움 때문에 2중등록 선수로 징계를 받은 그는 2년 동안 경기에 뛰지 못했다. 이후 이 팀 저 팀을 옮겨 다니며 재기를 노렸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고 서른의 아까운 나이에 축구화를 벗어야 했다. 거제고-동의대-중동고에서 후학을 키웠고, K3(대한축구협회 4부리그) 화성 FC를 맡아 2014년 우승을 이루기도 했다.
 
김 감독과 인터뷰 약속을 잡은 뒤 유튜브에 있는 5분짜리 동영상을 봤다. 20대 초반 대표팀에서 활약하던 장면을 모은 것이었다. 차붐의 힘과 스피드, 안정환의 부드러운 테크닉, 손흥민의 슈팅력을 합쳐 놓은 것 같았다. 지난 7일 경남 함안에 있는 경남 FC 클럽하우스에서 김 감독을 만나자마자 이 동영상 얘기부터 꺼냈다.
 
핀셋으로 장어 가시 하나하나 뽑기도
1986년 6월 6일 멕시코 월드컵 불가리아전 종료직전 동점골을 터뜨리고 있는 김종부. 왼쪽에 차범근이 보인다.

1986년 6월 6일 멕시코 월드컵 불가리아전 종료직전 동점골을 터뜨리고 있는 김종부. 왼쪽에 차범근이 보인다.

차붐·안정환·손흥민을 합친 것 같다는 말에 동의하십니까.
“희미하긴 해도 그 장면들이 기억납니다. 볼 다루는 거나 헤딩, 상대 선수 등지는 것, 슈팅 등이 좋았구나 싶네요. 당시 헤딩과 슈팅 훈련을 엄청나게 했거든요.”
 
당시 이 영상을 보여 줬다면 유럽에 진출할 수 있지 않았을까요.
“스페인 쪽에서 제의가 있긴 했어요. 그런데 해외 축구 동향에 대해 잘 몰랐고, 에이전트도 없었고…. 내가 봐도 저 정도면 먹히지 않았을까 싶어요. 축구에 눈이 트이면서 상대 선수 발이 보이기 시작할 때였거든요. 한번도 전성기를 못 누려 본 게 아쉽기는 하죠.”
 
2년 공백이 그렇게 컸습니까.
“몸도 몸이지만 마음의 상처가 컸어요. 빨리 재기해야겠다는 조바심에 서둘렀던 것도 화근이 됐죠. 약해진 부위를 차근차근 강화했어야 했는데, 12kg짜리 납 조끼를 입고 훈련하면서 무릎을 또 다쳤어요.”
 
서른에 은퇴하고 학교 팀들을 맡았는데요.
“김종부가 죽지 않았음을 좋은 지도자가 돼서 보여 주고 싶었어요. 학원축구에서 성적을 내면서 자신감이 생겼고, 성인 팀에 도전할 기회를 얻었죠. 언젠가는 프로 팀을 맡으리라 꿈을 꾸고 있었는데 결국 이뤄졌네요.”
 
아마추어 지도자를 하면서 장어구이집도 직접 운영하셨다면서요.
“2014년 K3 우승상금 300만원에 은행 대출 1000만원을 받아 화성의 허름한 짚불 삼겹살집을 인수했어요. 내 고향 통영산 바닷장어를 갖고 와서 구워 팔았죠. 소스는 어릴 적 먹던 기억을 되살려 직접 만들었고요. 낮에는 선수들 가르치고 밤에는 장어 굽고 잘라 줬죠. 어떤 손님이 ‘가시가 왜 이리 많냐’ 해서 핀셋으로 하나하나 뽑았던 기억도 있어요. 허허.”
 
장어집을 한 게 ‘김종부라는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였다’는 말이 있던데요.
“그것보다는 살아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했다는 게 맞아요. K3 감독 월급이 세금 떼고 260만원 나오는데 집에 240만원 갖다주고 20만원으로 한 달 버텨야 했어요. 이래선 아무것도 못 하겠다 싶어 생계형 투잡을 시작한 거죠.”
 
농구선수 출신 말컹, 골잡이로 조련
11월 20일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차범근 전 감독으로부터 K리그 챌린지 감독상을 받는 김종부 감독.

11월 20일 K리그 대상 시상식에서 차범근 전 감독으로부터 K리그 챌린지 감독상을 받는 김종부 감독.

김종부 감독은 2015년 12월에 경남 FC의 부름을 받았다. 당시 경남은 더 이상 내려갈 곳이 없는 상태였다. 팀은 1부에서 강등됐고, 전임 대표이사가 심판 매수에 연루돼 승점 10점을 삭감당하고 시즌을 시작해야 했다. 주전급은 다 빠져나갔는데 남은 선수들도 연봉 5000만원선에 맞추라고 했다. 김 감독은 이런 상황에서 지난해 61골로 K리그 챌린지 10개 팀 중 최다득점을 기록했다.
 
올 시즌은 거칠 게 없었다. 개막 이후 18경기 연속 무패(12승6무)로 선두를 놓지 않았고 마침내 챌린지 우승과 1부 승격을 이뤄 냈다. 브라질에서 데려온 농구선수 출신 말컹(23·1m96cm)은 22골을 넣어 득점왕·MVP를 차지했다. 김 감독은 “시련의 쓴맛을 보면서 얻은 경험들이 사람의 마음을 읽고 선수들의 동기를 불러일으키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고 했다.
 
말컹이라는 보물을 얻었는데요.
“처음엔 모두 반신반의했어요. 축구로 전향한 지 6년 밖에 안 돼 축구를 농구 스타일로 하더라고요. 점프도 덩크슛 하듯 하고. 단점을 하나하나 고쳐 주면서 자신있게 할 수 있도록 도왔죠. 말컹이 골을 넣을 수 있도록 측면 크로스 중심으로 공격 루트를 최적화 시켰어요.”
 
선수들에게 강조하는 게 뭡니까.
“부지런함이죠. 한발 먼저 생각하고 먼저 움직이는 부지런함. 공을 잡고 나서 뭘 해 보겠다고 하면 늦어요. 미리 공간과 동료·상대 움직임을 봐 두고 판단을 빨리 하면 좋은 플레이를 할 수 있어요. 전 그걸 ‘시야축구’라고 부릅니다.”
 
‘판단의 속도’ 얘기라면 다른 감독들도 다 하는 거 아닙니까.
“원리야 다 알죠. 그걸 선수들에게 어떻게 넣어 주느냐 하는 겁니다. 배가 부르면 여유가 생기고 처질 수밖에 없어요. 난 진짜 절박했으니까 될 때까지 계속 밀어붙인 거죠. 우리 선수들도 절박하니까 그걸 체득하기 위해 애를 쓴 거고요. 다른 팀에서 버림받은 선수들이 여기 와서 보란 듯이 재기한 경우가 많아요.”
 
그게 실전에서 어떻게 나타났나요.
“공격 패턴을 최소화 한 뒤 ‘측면 돌파 후 크로스’를 세트 플레이(프리킥·코너킥 같은 것)처럼 반복 연습했어요. 약속된 플레이를 하니까 상대보다 먼저 움직여서 골 찬스를 만들 수 있었죠. 올해 69골로 최다득점을 한 비결도 거기 있습니다.”
 
‘이런 팀을 만들어보고 싶다’ 하는 게 있나요.
“그게 위험천만한 겁니다. 감독이라면 누구나 화려하고 멋진 축구를 보여 주고 싶죠. 그러나 아무리 구상을 완벽하게 해도 선수들이 소화를 못 해내면 아무 소용이 없어요. 좋은 축구보다는 그런 축구를 할 수 있는 선수를 만드는 게 우선입니다.”
 
우승 경쟁을 하던 부산 아이파크 조진호 감독이 심장마비로 급서했는데요.
“너무 슬프고 안타까워서 우승 확정 뒤에 헹가래도 사양했어요. 모든 챌린지 감독이 그렇지만 조 감독도 1부 승격에 대한 압박감이 엄청났던 거죠. 챌린지 팀에서 2년을 버틴 감독이 거의 없어요. 한 팀에서 최소한의 색깔을 낼 수 있는 시간을 주지 않습니다.”
 
인터뷰는 저녁 자리로 이어졌다. 김 감독에게 어떤 축구인으로 기억되고 싶은지 물었다.
 
“이번 시상식에서 상을 받는 것도 좋았지만 축구인으로서 이런 자리에 낄 수 있게 됐다는 게 더 기뻤어요. 이제 시작입니다. 늦었지만 하나씩 하나씩 몸에 새겨가면서 여기까지 올라왔어요. 이기는 것과 지는 것에 대해 입력이 많이 돼 있습니다. 절실함은 누구에게도 지지 않아요. 내년 클래식에 가서 그걸 검증해 보고 싶습니다.”
 
그는 분명 천재였다. 그 앞에 붙은 ‘비운’이라는 수식어를 떼고 싶어했다. 그 간절한 열망이 그를 일으켜 세웠다.
 
 
정영재 스포츠선임기자
jerry@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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