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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소문 포럼] 김상조 위원장, 다만 …

중앙일보 2017.12.07 01:57 종합 32면 지면보기
서경호 논설위원

서경호 논설위원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은 교수 시절부터 군더더기 없이 말 똑 부러지게 잘하는 전문가로 통했다. 그에겐 특유의 어법이 있다. ‘다만’이라는 부사를 즐겨 구사하며 앞의 발언을 더 정교하게 다듬곤 한다. 공정위원장이 된 이후에도 오랜 습관은 여전했다. 지난 10월 국회에서 열린 공정위 국정감사 하루에만 ‘다만 어법’은 수십 번 되풀이됐다. 이런 식이다. “네이버는 시장지배적 사업자로서 지위 남용의 소지가 있고 많은 민원이 제기되고 있다. 다만 이것이 미래 산업의 문제이기 때문에 매우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다.” “(재벌 개혁) 열심히 하고 있다. 다만 시장에 큰 충격이 없도록 지속 가능하고 예측 가능한 방식으로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
 

무엇을 어떻게 대기업 스스로 개혁하라는 말인지
을의 눈물 닦아 줘야 하지만 선택과 집중은 필요

진짜 하고 싶은 말을 ‘다만’ 뒤에 붙이는 경우도 있다. 역시 같은 날 국감에서 공정위의 경제분석 역량을 강화해야 한다는 질의에 이렇게 답했다. “내년 중에 박사급 인력 4명을 충원하기로 했다. 다만 이 정도로는 턱도 없다고 생각한다.” 지난달 5대 그룹 경영자와 만나 모두발언을 할 때도 ‘다만’ 뒤쪽에 힘이 실려 있었다. “5대 그룹이 선도적으로 상생협력 방안을 실천하는 것에 감사한다. 다만 국민께 약속한 공약과 국정과제 목표에 비춰볼 때 기업들의 자발적인 개혁 의지에 여전히 의구심이 남아 있다.” 김 위원장은 이날 “딱딱한 규제를 통해 마치 칼춤을 추듯이 접근하는 기업 개혁을 할 생각 없다” 등의 유화적 발언도 했지만 언론은 공익재단과 지주회사 전수조사를 거론한 대목을 대서특필했다. 이 회동 후 다른 자리에 참석해 가볍게 내뱉은 “재벌 혼내주고 오느라고 늦었다”는 말은 구설에 올랐다.
 
‘다만 김상조’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자주 구사되는 그의 ‘다만 어법’을 나는 경제학자의 직업병 비슷한 것으로 생각했다. 비용과 편익을 균형 있게 따지고 남들이 빛나는 것만 얘기할 때 굳이 어두움도 함께 짚어 주는 게 경제학자다. ‘다만 김상조’가 창백한 이론가가 아닌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여 주는 것이라면 그는 지금 고민이 많을 것이다. 재벌의 권한과 책임을 일치시키는 재벌 개혁을 밀어붙여 J노믹스의 한 축인 공정경제에서 성과를 내는 한편 평소 소신대로 한국 경제의 귀중한 자산인 재벌의 생산력을 훼손시켜서도 안 되기 때문이다. 재벌 개혁은 공정거래법만이 아니라 상법·세법·자본시장법·금융관련법 등 여러 규율 수단이 체계적이고 합리적으로 어우러져야 지속 가능한 성과를 얻는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다만, 요즘 대기업에 쏟아지는 규제들이 현실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 선을 넘지 않았는지도 검토했으면 한다. 대기업 스스로 개혁하라는 메시지도 더 분명하게 가다듬어야 한다. 재계에선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고치라는 얘기인지 잘 모르겠다”고 하소연한다. 자칫하면 뒷골목 힘자랑하는 이들의 말처럼 오해될 수 있다. 눈 부라리며 ‘너, 알아서 해라’는 말이 어둠의 세계에선 제일 무서운 말이다. 경쟁정책이 재벌 군기를 잡는 얼차려 도구로 쓰인 흑역사를 재계는 기억한다. 구체적 방향을 제시하기 힘들면 그냥 일감 몰아주기 등 잘못된 행위를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법에 따라 제재하면 된다.
 
김 위원장은 취임사에서 경쟁법의 목적은 경쟁을 보호하는 것이라면서도 경쟁자 보호, 즉 을의 눈물을 닦아 달라는 사회적 요구도 무시하지 않겠다고 했다. 반대방향으로 뛰어가는 두 토끼를 다 잡겠다는 큰 포부는 알겠는데, 현실과의 괴리가 크다. 자칫하면 게도 구럭도 다 잃을 수 있다. 갑을 관계에서 억울함을 호소하는 민원은 두 배로 늘어났는데 실제 사건 처리는 예전만 못하다고 한다. 위원장은 신속하면서도 공정하고 투명한 사건 처리를 강조하는데 직원들은 버거워한다. 일을 빨리 하려면 아무래도 완성도가 떨어지고, 완성도를 높이려면 일 처리가 늦어진다. 결국 을의 눈물을 닦아 주는 데도 선택과 집중이 중요하다. 이게 다만, 내가 하고 싶은 얘기다.
 
서경호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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