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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세상읽기] 청와대발 직접민주주의의 허상

중앙일보 2017.12.06 01:53 종합 32면 지면보기
이훈범 논설위원

이훈범 논설위원

예로부터 민초들이 국가에 억울함을 호소하기란 그 자체가 고난이었다. 송 태조 때 이미 등문고(登聞鼓)를 설치한 중국이었지만, 1000년이 지나도록 사정은 나아지지 않았다. 사학자 이중톈(易中天)이 『제국의 슬픔』에서 묘사하고 있는 청나라 때 상황을 보면 기가 막히다. 관리의 수레를 막고 억울함을 호소하는 건 영화에서나 가능한 일이었다. 발길질이 날아오기 예사였고 창날이 목을 겨누지 않으면 다행이었다. 관청에 고소하려면 못이 가득 박힌 나무판자에 엎드려 고소장을 읽어야 했다. 관가에 가 북을 치면 일단 곤장 50대부터 맞고 시작했다. 이러니 정말 죽을 만큼 원통한 일이 아니면 관청에 호소할 생각도 못했다. 가까스로 이 과정을 넘었더라도 산 넘어 산이었다. 길고 복잡한 행정 절차가 겨우 끝났을 때면 이미 상대가 죽었거나 고소인이 재산을 모두 잃고 난 뒤이기 일쑤였다.
 

국민과 대통령이 직거래하는 게 직접민주주의가 아니다
아무리 철인군주라도 언제든 절대군주로 변할 수 있다

등문고를 본받아 조선 태종 때 신문고(申聞鼓)를 매달았던 우리나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다. ‘못판’을 구를 일은 없더라도 일반 백성들에게는 가까이 하기에 너무도 먼 북이었다. 지방 백성의 경우 고을 수령을 거쳐 관찰사, 사헌부에 차례로 허가를 받은 뒤 대역죄인을 다루는 의금부에 가서 신문고를 두드려야 했다. 오금이 저려서 북채나 들 수 있었겠나. 방귀깨나 뀌는 서울 양반이나 다가갈 마음을 먹을 수 있었을 터다. 중국이나 우리나 이런 험난함을 감수하기보단 관리에게 뇌물을 주고 급행으로 일을 처리하는 게 현명한 선택이자 남는 장사였다.
 
신문고 제도는 현대에 들어와서도 각종 이름으로 명맥을 유지했다. 하지만 효과도 딱 그만큼이었다. 비약적인 기술 발전에 맞춰 부처별로 온라인 신문고가 도입됐고 전담기구인 국민권익위원회까지 만들어졌지만, 함께 커진 민도와 국민적 요구 수준을 따라잡지 못했다. 그저 목숨을 부지할 만한 정도의, 전시행정(展示行政) 그 자체였다.
 
[일러스트=김회룡]

[일러스트=김회룡]

그러던 것을 문재인 정부가 바꿔 놓았다. 북 앞에 이르는 모든 장벽을 없애버렸다. 그것도 다른 곳도 아닌 국가 최고권력기관 청와대에 설치된 북이다. 누구든 어떤 사정이든 두드릴 수 있다. 심지어 “문재인 탄핵”을 주장하는 청원도 있다. 전 정권의 불통을 극복할 과제를 안은 청와대는 소통하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30일 내 추천 20만 건이 되면 공식 답변한다’는 원칙을 제시했다. 기준에 미달되더라도 적극 답변하라고 대통령이 지시했다. 워낙 소통에 목말라하던 국민들이었다. 열광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동의가 수십만 건에 이른 청원이 잇따랐다.
 
어쨌거나 ‘대박’이었다. 청와대도 신이 났다. 민정수석이 두 번이나 답변을 위해 카메라 앞에 앉았다. 거듭된 인사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는 언론 지적에 코빼기도 보이지 않던 인물이었다. ‘쇼통(show+소통)’이라는 비난도 있지만 담당 부처 장관보다는 청와대 핵심 수석이 직접 답변하는 게 더욱 극적이었다. 기왕 욕 먹을 바에는 제대로 ‘쇼통’하는 게 나았다.
 
하지만 이것도 여기까지다.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라도 여기서 멈춰야 한다. 물론 국민들의 기대수준은 대의민주주의를 넘어서고 있다. 의회는 이미 오래전에 신뢰를 잃었다. 자기가 대표하는 국민보다 권력자 심기를 경호(?)하는 데 주력하는 의회에 기대는 대신 국민들은 두 번이나 직접행동에 나섰다. 그중 한 번은 대통령 탄핵이라는 사상 초유의 결과를 이끌어 냈다. 이런 변화를 포착한 이 정부는 (공론화와 함께) ‘국민청원’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다. “국민들이 직접민주주의를 요구하고 있다”는 말까지 대통령 입에서 나왔다.
 
하지만 국민들과 대통령이 직접 거래하는 게 직접민주주의는 아니다. 국민청원을 통해 청와대는 모든 이슈를 선점하는 효과를 얻었다. 국민들의 관심이 온통 청와대에 쏠려 이슈 해결을 주도할 수 있는 동력도 확보했다. 하지만 절대군주도 아닌 대통령이 모든 문제를 고쳐줄 수 있다는 ‘반(反)민주주의’ ‘비(非)정치’ 인식을 확산하는 잘못을 저질렀다. 아무리 철인(哲人)군주가 백성을 보살핀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민주주의가 아니다. 그리고 국민들이 그런 군주제를 바라는 것도 아니다. 군주 앞에 무장해제된 의회를 바라는 건 더더욱 아니다.
 
더 큰 위험은 청와대 신문고가 기존 청원제도 자체를 무력화할 위험을 안고 있다는 것이다. 청와대 국민청원은 법률에 근거한 정식 절차라기보다 반짝이는 아이디어로 만든 ‘공론창구’일 뿐이다. 대통령이 관심을 잃으면 언제든 유명무실화할 수 있다는 말이다. 철인군주가 언제든 절대군주로 바뀔 위험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직접민주주의는 그런 게 아니다. 청원법으로 규정된 기존 청원제도를 활성화하는 게 우선인 것이다. 그래서 정권이 바뀌더라도 신문고가 활발히 두드려질 수 있게 만드는 게 직접민주주의의 첫걸음이다.
 
이훈범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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