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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지는 ‘주취 감경 폐지’ 여론, 법조계는 신중론 우세

중앙일보 2017.12.04 20:35
'조두순의 만기 출소 시기가 3년 앞으로 다가왔다는 사실에서 출발한 국민청원 운동이 2라운드를 맞고 있다. 지난 9월부터 시작된 '재심으로 조두순의 출소를 막아달라'는 청원에 동참한 사람이 60만 명을 돌파한 데 이어 지난달 4일 시작된 ‘주취(酒醉) 감경 폐지' 청원에 한 달 동안 참여한 사람이 20만 명을 넘었다. 재심으로 조두순에게 형을 추가하는 것이 일사부재리의 원칙상 불가능하다는 사실이 공유되면서 국민청원이 '제2의 조두순 재판'을 막자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한 것이다.  
 

조두순 형량 감경 원인 '주취 감경' 폐지 청원 20만 돌파
2013년 성범죄 한 해 주치 감경 사실상 사라져
아동학대·살인 등 반인륜·강력 범죄서는 여전히 작동
법조계 "폐지는 책임주의 형벌체계에 혼란" 신중론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이 지난 26일 청와대 홈페이지,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를 통해 '친절한 청와대'라는 이름으로 23만 명이 청원한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해 답변을 하고 있다. 청와대는 한 달 동안 20만 명 이상이 동참한 국민 청원에 답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진 유튜브 캡처]

청와대 조국 민정수석이 지난 26일 청와대 홈페이지, 페이스북, 트위터, 유튜브를 통해 '친절한 청와대'라는 이름으로 23만 명이 청원한 낙태죄 폐지 청원에 대해 답변을 하고 있다. 청와대는 한 달 동안 20만 명 이상이 동참한 국민 청원에 답하겠다고 약속했다. [사진 유튜브 캡처]

2009년 검찰은 조두순에게 강간상해 혐의로 무기징역을 구형했지만, 법원이 징역 12년 형을 확정했다. 범행 당시 술에 취해 있었다는 조두순의 주장을 토대로 법원이 ‘심신미약’을 인정해 형을 감경한 것이 선고 형량에 크게 영향을 미쳤다. 심신미약으로 인정되면 판사는 반드시 형량을 감경해야 하고, 당시 법제상 '술에 취한 상태'는 어떤 범죄에서든 대표적인 심신미약 사유로 인정되고 있었기 때문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진행 중인 국민 청원은 모든 범죄에서 ‘주취(酒醉) 감경’ 자체를 폐지하자는 주장이다. 조두순의 출소를 막을 수는 없지만 유사한 범죄자들이 법 감정에 비해 경미한 처벌을 받고 풀려날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하자는 취지다. ▶현행범이 아닌 이상 범행 당시 주취(酒醉) 상태였는지 객관적으로 판단하기 어렵고▶‘술을 먹으면 감형된다’는 인식이 퍼지면 유사한 범죄가 계속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 등이 이 청원에 달린 논거다.
 
‘주취 감경’은 2009년 조두순 재판 과정에서 이미 논란이 됐다. 같은 해 대법원 양형위원회는 강간상해 등 성범죄에서 정상인의 평균 형량은 31개월이었지만 주취자는 26개월에 불과하다는 조사 결과를 내놓기도 했다. 이후에도 2012년 수원에서 20대 여성을 토막 살해한 오원춘도 “술에 취해 벌인 일”이라며 주취 감경을 시도하는 등 문제가 계속되자 국회는 2013년 6월 성폭력 특례법을 개정했다. 성범죄에 관한 한 판사가 재량에 따라 음주나 약물로 인한 심신미약 주장을 고려하지 않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실제로 2014년 1월 대전고법 청주 형사1부(부장 김시철)는 처음으로 변경된 규정을 근거로 만취 상태에서 미성년인 조카를 강간하고 살해한 오모씨의 심신미약 주장을 배척하고 무기징역을 선고했다. 이후 법원은 성범죄에 관한 한 더는 “술에 취해서…”라는 주장을 수용하지 않고 있다. 서울중앙지법의 한 부장판사는 “판사의 재량이라지만 사실상 성범죄에서 주취 감경은 폐지된 것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   
 
2009년 성폭력 범죄에 관한 한 음주를 심신미약 인정 사유에서 배제하라고 주장하는 한국성폭력상담소 관계자. 2010년 대법원은 양형기준을 바꿨고 2013년 국회는 성폭력 특례법을 개정했다. .

2009년 성폭력 범죄에 관한 한 음주를 심신미약 인정 사유에서 배제하라고 주장하는 한국성폭력상담소 관계자. 2010년 대법원은 양형기준을 바꿨고 2013년 국회는 성폭력 특례법을 개정했다. .

그러나 성폭력을 동반하지 않는 아동학대ㆍ가정폭력 및 살인ㆍ강도 등 강력 범죄나 반인륜 범죄에서는 여전히 ‘술에 취한 상태’가 감경 요인으로 작동하고 있다. 지난해 3월 창원지법 전주지원은 만취 상태에서 단독 주택에 침입해 잠자던 60대 남성을 이유 없이 흉기로 찔러 숨지게 한 20대 강모씨에게 심신미약을 이유로 형을 감경해 징역 15년 형을 선고했다. 지난 7월 서울남부지법은 지난해 노숙자센터에서 만난 B씨와 소주 5병을 나눠 먹은 뒤 B씨를 벽돌로 내리쳐 숨지게 한 박모(51)씨에게 징역 10년 형을 선고했다. “살인 뒤에 B씨의 방에서 잠드는 등 술에 취해 심신 미약 상태에서 범행을 저질렀다고 볼 수밖에 없다”는 게 재판부가 제시한 이유다.   
 
이번 국민 청원 이전에도 이 같은 판결이 날 때마다 누적된 국민의 불만을 국회는 잘 알고 있다. 19대 국회 때부터 아예 ‘음주’를 심신미약 인정 사유에서 배제하자는 형법 개정안부터 아동학대 특별법이나 가정폭력 특례법에 주취 감경을 배제할 수 있는 근거를 마련하자는 법 개정안들이 계속 발의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움직임을 대하는 법조계의 반응은 신중론이 우세하다. ‘책임이 없으면 형벌이 없다’는 책임주의가 범죄와 형벌을 다루는 형사법의 대원칙이기 때문이다. 사리 분별 능력을 상실해 어떤 법적 책임을 질 거라고 생각지 못하고 범죄의 결과를 낳은 사람에게는 책임능력이 제한된다 보아 법적 책임을 감경 또는 면제하는 게 형벌 체계의 뼈대다.  
 
하태훈 고려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는 "자기 의지대로 술을 마셨어도 범죄 의도가 없이 결과를 발생시킨 경우는 범죄를 예견하면서 술을 마신 사람과는 달리 보아야 한다는 게 책임 원칙의 의미"라며 "주취 감경을 폐지하는 것은 형벌체계에 혼란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중앙지검 여성아동범죄조사부장을 지낸 김진숙 변호사는 “조두순은 '음주→범죄'를 반복해 범죄를 예견하면서 술을 마셨다고 볼 여지가 있음에도 형을 낮춰 논란이 됐던 것”이라며 “이 때문에 형사법의 대원칙에 손을 댈 수는 없는 노릇"이라고 말했다. 수도권 법원의 한 부장판사는 "주취 감경을 받는 피고인들은 알코올 의존증이 심각한 경우가 많다. 처벌보다는 치료가 범죄를 막는 길일 수 있다"고 덧붙였다.   
 
임장혁ㆍ김선미 기자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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