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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임 너무 지우니, 공무원들 위기 올 때까지 복지부동”

중앙일보 2017.12.04 01:23 종합 8면 지면보기
외환위기 극복 이끈 이헌재 전 부총리
이헌재 전 부총리가 지난달 27일 서울 통의동 사무실에서 외환위기 20년을 맞아 인터뷰를 하고 새로운 위기 대응 시스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신인섭 기자]

이헌재 전 부총리가 지난달 27일 서울 통의동 사무실에서 외환위기 20년을 맞아 인터뷰를 하고 새로운 위기 대응 시스템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신인섭 기자]

“지금까지 한국 경제의 질적·구조적 문제에 대해 얘기하는 건 조심스러웠다. 이제 (외환위기를 겪은 지) 20년이 됐으니 언급할 때가 됐다.”

정무적·법률적 책임 선 그어놔야
구제역 등 일상화된 위기 극복

구조조정은 은행이 알아서 하는 것
정부정책에 그 단어 자체가 없어야

최저임금 인상, 정규직 전환
되레 일자리 줄이는 정책 될 수도

공무원 한번 늘리면 줄이기 힘들어
AI 시대 오면 잉여 노동력 될 것

 
1998년 금융감독위원장을 맡아 외환위기 극복을 주도한 이헌재 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은 2011년부터 이듬해까지 중앙일보에 ‘남기고 싶은 이야기-위기를 쏘다’를 연재했다. 이를 통해 외환위기 당시 구조조정 과정의 비사(秘史)를 밝혔다. 이 연재는 ‘위기의 매뉴얼’로 통한다.
 
외환위기 20주년을 맞아 이 전 부총리는 지난달 27일 서울 통의동 자신의 사무실에서 중앙일보와 인터뷰하고 현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짚었다. 이 전 부총리는 “위기는 일상화됐는데 이에 대한 시스템적 대응이 보이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그 원인으로 ‘무책임 사회’를 들었다. 공직자 등에게 지나치게 책임을 지워 위기 발생 전까지는 복지부동하게 하는 경향을 만들었다는 얘기다.
 
이 전 부총리는 한국의 외환위기 극복 과정을 ‘미완의 개혁’이라고 평가했다. 이제라도 외환위기 도래 및 극복 과정에서 드러나고 지금도 해결하지 못한 한국 경제의 구조적 문제를 분석하고 해법을 찾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다. 다음은 이 전 부총리와의 일문일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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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환위기를 겪은 지 20년이 됐다.
"위기는 본래 일상의 일탈이다. 지금은 위기 자체가 일상화했다. 위기관리 전략도 시스템으로 전환해야 하는 이유다. 이런 대응법의 변화가 있는지 의구심이 든다.”
 
1997년 12월 3일 한국 정부와 IMF가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한 사실을 보도한 4일자 중앙일보 1면.

1997년 12월 3일 한국 정부와 IMF가 구제금융 합의서에 서명한 사실을 보도한 4일자 중앙일보 1면.

위기 극복에 성공했다는 평가도 있다.
"위기 극복으로 국민이 자신감과 자부심을 얻었나? 오히려 절망감과 정부·공동체에 대한 불신이 생겼다. 위기를 외면하고, 위기 가능성을 무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위기 극복을 통해 교훈을 얻어야 하고 잘못된 걸 시정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지 못했다. 매년 조류인플루엔자와 구제역이 발생하지만 시스템에 따른 대응은 보이지 않는다.”
 
시스템에 따른 대응이 부재한 이유는 .
"책임을 너무 강조하면 책임을 회피하는 무책임 사회가 된다. 무책임 사회가 되면 책임을 져야 하는 공무원 등은 위기 발생 전까지 손을 놓는다. 사전에 준비하다가 잘못되면 책임 소재에 휘말릴 수 있다. 2008년 숭례문 화재가 그 예다. 문화재 훼손을 우려로 관리를 제대로 하지 않았다. 결국 아무도 책임지지 않았다. 무책임 사회가 되면 위기가 반복·증폭된다.”
 
외환위기 때 정부 대응을 평가하면.
"당시에 시장이 붕괴했다. 시장이 어떻게든 작동하도록 해야 했다. 빨리 끝내자는 데 매달렸다. 위기의 ‘조기 졸업’은 성공했다. 그러나 위기 극복 후의 체계적인 관리 시스템을 마련하고 집행하는 것에는 미흡했다. 우리 모두가 외환위기를 빨리 끝내고, 잊어 버리고 싶어했다. 대강 덮은 이유다. 그래서 ‘미완의 개혁’이다.”
 
‘미완의 개혁’을 어떻게 완성해야 하나.
"외환위기를 변곡점으로 우리 경제에 중요한 변화가 있었다. 정부 관리 체제에서 시장 주도 체제로 바뀌는 과정을 정부가 주도했다. 그래서 관치라고 했다. 이 과정이 제대로 됐는지 짚어야 한다. 앞으로는 시장이 주도해야 한다.”
 
외환위기 20년 뭐가 달라졌나

외환위기 20년 뭐가 달라졌나

일상화한 위기에 대응하는 국가 시스템은 어떻게 만드나.
"의사결정 시스템을 투명하게 해야 한다. 일이 터지면 당국자는 무한 책임을 진다. 이제는 유한책임 시스템이 필요하다. 권한 위임을 분명히 해야 한다. 정무적인 책임을 질지, 법률적 책임을 져야 할지를 확실하게 정해야 한다. 또 객관적으로 관찰하고 현실을 직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그렇게 하려면 이념과 개인적 가치에서 벗어나야 한다.”
 
최근 신고리 원전 5, 6호기를 둘러싼 공론화 방식을 이런 노력으로 볼 수 있나.
"부분적으로나마 객관적으로 접근하려 노력했다. 첫 시도이다 보니 완벽하지 못했다. 다만 한국에는 싫든 좋든 국회라는 대의 체제가 있다. 국회에서 충분히 논의할 수 있도록 전문가들이 의견을 내고, 지나치게 한쪽으로 치우친 주장은 제거해야 한다. 국회의원이 일을 잘하는지 따지기 전에 일을 제대로 할 수 있도록 사회적 압력을 가하는 게 중요하다. 제한된 자원에서 대의 민주주의 체제를 갖고 있다면 그걸 제대로 활용해야 한다.”
 
20년 전 ‘금 모으기’ 운동이 있었는데.
"국민과 언론이 강조하는 게 ‘IMF 위기’다. 우리 스스로의 위기라고 하기엔 억울하다고 생각한다. 외부에 책임을 돌린다. 우리가 왜 변화에 대응을 못 했는지에 대한 성찰이 없었다. 안팎으로 위기설이 돌아다니는 이유다. 공무원과 결정권자는 자기 책임을 의식해 적극적인 대응을 못 한다. 이러면 응집력이 생기지 않는다. 당시 국민은 금 모으기라도 해서 기여하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이런 자신감을 정부가 주지 못하고 있다.”
 
최근 경제 상황을 어떻게 보는가. 올해 3%대 성장이 유력하다.
"착시 현상을 무시하면 안 된다. 97년 외환위기도 착시에서 비롯됐다. 당시에도 수출이 잘되고 경제 펀더멘털(기초 지표)도 좋다고 했다. 지금도 착시 현상이 있다. 구성원에게 경제활동의 혜택이 돌아가야 한다. 그 채널이 고용이다. 그런데 고용의 양과 질이 좋지 않다.”
 
중국의 추격, 저출산·고령화 등 고질적인 문제도 산적해 있다.
"중국이 추격한다고 얘기한다. 문제는 그게 아니다. 중국은 갈 길을 간다. 우리는 우리 길을 못 가고 허겁지겁한다. 인구 절벽에 대한 우려가 크다. 그렇지만 여성·노인 인력 활용도 제대로 안 된다. 미래 잠재 성장력이 떨어진다고 하는데, 당장 우리가 가진 잠재 인력도 제대로 가용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한 단계 더 성장하기 위해선 지식 노동자의 부가가치를 늘려야 한다. 이런 분야에 투자하지 않는다. 하드웨어와 인프라에만 관심을 가진다. 소프트파워에 대한 투자는 미흡하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 주도 성장으로 한국 경제의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 혁신성장도 함께 내세웠다.
"결국 성과가 나와야 한다. 지금은 거시적 담론만 있다. 구체적 방안이 없다.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내세웠다. 문재인 정부는 ‘슘페터식 혁신’을 내세운다. 그런데 창조와 혁신으로 기업가 정신이 어떻게 일어나는지에 대한 대답이 없다. 아직은 판단하기 어렵다.”
 
정부가 내년 최저임금을 대폭 인상했다.
"지속 가능성이 문제다. 최저임금을 근로장려금(EITC)과 연계할 수 있다. 최저임금에서 모자란 부분은 EITC를 통해 보충할 수 있다. 좀 더 시장 친화적이고 자생적인 방법이 있다. 최저임금 인상, 정규직 전환 등 일자리를 늘리고 고용환경을 개선하려는 정책이 오히려 일자리를 줄일 수 있다. 그렇지 않아도 줄고 있는 취업 기회를 없애는 건 아닌지 생각해 봐야 한다.”
 
현 정부가 공무원 증원을 추진하는데.
“한번 공무원 수를 늘리면 되돌리기 어렵다. 특히 인공지능(AI) 발전이 본격화하면 상당수 공무원은 잉여 노동력이 될 수 있다. 공무원 수를 줄여야 한다는 얘기다. 그때 어떻게 해결할 것인지 생각해야 한다. 또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의 최종 목적지가 공무원이라면 사회 전체의 생산성이 떨어질 수밖에 없다.”
 
경제성장을 위한 정부의 역할은.
"정부가 일일이 답을 정해 지원할 필요는 없다. 대신 자원의 제약성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 재정 지출을 조절해야 한다는 얘기다. 이건 기득권의 재분배다. 기왕에 나갔던 것을 끊고 새로운 방향으로 물꼬를 터야 한다.”
 
구조조정은 어떤 방향으로 가야 하나.
"정부 정책에서 구조조정이란 단어 자체가 없어야 한다. 시장에서 해결하기에 사회적 영향이 너무 크다면 정부는 그때 나서야 한다. 구조조정 측면에서 더 답답한 건 은행이고, 해당 회사의 경영자와 근로자다. 이들은 어떻게든 살아남기 위해 노력할 것이다. 구조조정의 조건이 국가의 환경에 따라 다르긴 하지만, 기본적으로 은행이 알아서 하는 거다.”
 
노동 문제도 한국 사회의 오랜 숙제다.
"노동의 유연성·안전성은 개념적으로 존재할 뿐이다. 일률적인 해답이 나올 수 없다. 산업화 시대의 노동 형태와 과도기적 노동 형태, 미래의 노동 형태가 다르다. 새로운 패러다임에 대한 현실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다양한 수요를 하나의 제도로 다 흡수해 해결할 수는 없다.”
 
창의적인 인재는 어떻게 키워야 하나.
"최근 포항에 지진이 났을 때 포항 지역 학교에서 문제가 생겼고, 이것이 전국으로 퍼졌다. 그런데 동일한 날짜, 동일한 시간에 전국에 걸쳐 똑같은 시험을 치르는 게 20년 가까이 진행됐다. 여기에 대한 개선이 전혀 없다. 획일적인 시험 아래에서 다양성과 창의성을 키울 수는 없다. 대학 교육을 국가가 관리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
 
현재 금융 산업은 어떻게 평가하는가.
"몸집은 커졌다. 그러나 단순 업무를 둘러싼 과잉 경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특색 있는 수익 구조를 가진 은행이 없다. 우리 경제 전체가 다양성과 활력을 가지지 못한 것과 마찬가지다. 인터넷은행을 제대로 하려면 규제를 풀어야 한다. 지금처럼 두 곳(케이뱅크, 카카오뱅크)만 인가하면 기득권이 된다.” 
 
◆이헌재
1944년 중국 상하이에서 태어나 경기고와 서울대 법대를 졸업했다. 68년 행정고시에 수석 합격해 6년 만에 재무부 금융정책과장에 올랐다. 97년 12월 외환위기 한복판에서 비상경제대책위원회 실무단장으로 일했다. 김대중 정부 시절인 98년 초대 금융감독위원장을 맡아 2년간 기업·금융 구조조정을 총괄했다. 특유의 추진력으로 ‘위기 해결사’라는 별명이 붙었다. 2000년 재정경제부 장관이 됐으며 노무현 정부 시절인 2004년 부총리 겸 재정경제부 장관에 임명됐다. 현재 국가미래전략을 연구하는 싱크탱크인 재단법인 여시재 이사장이다.

 
김원배·하남현 기자 ha.namhyu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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