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춤 출 수 있는 모든 곡 담긴 선물세트

중앙선데이 2017.12.03 02:00 560호 27면 지면보기
빔 벤더스 감독의 2011년작 영화 ‘피나’ 포스터. 안무가 피나 바우쉬를 기억하기 위한 영상 다큐멘터리다.

빔 벤더스 감독의 2011년작 영화 ‘피나’ 포스터. 안무가 피나 바우쉬를 기억하기 위한 영상 다큐멘터리다.

유령처럼 여자가 등장한다. 어두운 방안을 걷는다. 제멋대로 놓인 의자에 툭 부딪힌다. 회전문을 통해 다른 여자가 들어온다. 그녀는 종종걸음으로 무대를 돈다. 피나 바우쉬의 ‘카페 뮐러’는 이렇게 시작된다.

WITH 樂: 영화 ‘피나’의 사운드 트랙

 
피나 바우쉬(Pina Bausch, 1940~2009)는 20세기 무용계의 혁명가였다. 그녀의 도구는 원초적인 인간의 몸이었다. 춤과 연극을 결합하는 것은 물론이고 다양한 장르를 아울러 혼성적인 연출로 무용계를 쇄신했다. 인간 사이의 소통부재, 인간과 세계의 갈등, 그리고 인간 내면의 끊임없는 염원 을 주로 그려냈다. 70년대 초 그녀는 자신이 맡은 독일 부퍼탈시의 무용단을 ‘탄츠테아터(Tanztheater)’로 바꿔 부른다. 이후 ‘카페 뮐러’ ‘봄의 제전’ ‘콘탁트 호프’ 등을 공연하며 그녀는 세계 무용계를 장악해나갔다. 
 
무용을 잘 알지 못하는 이들에게 그녀의 작품을 알린 것은 영화였다. 특히 스페인 영화 ‘그녀에게’는 영화의 시작과 끝이 피나의 무대로 장식되었다. 영화 서사의 강렬함만큼이나 극중 등장하는 공연들은 인상적이다. 2011년 독일의 거장 빔 벤더스는 평소 존경했던 그녀를 주인공으로 다큐멘터리 영화 ‘피나’를 만든다. 하지만 촬영을 앞두고 그녀는 세상을 떠나고 만다. 결국 영화에는 피나가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 대신 그녀의 정신이라 할 수 있는 작품들과 탄츠테아터의 동료들이 그녀를 기억한다.
 
영화 ‘피나’는 감각적인 영상만큼이나 사운드 트랙도 기억할 만하다. 모든 곡이 영화 속 무용 장면에 등장한다. 빔 벤더스 감독은 피나의 안무를 야외로 끌어낸다. 공장이나 지하철 엘리베이터, 계곡이나 사막에서 그녀의 춤이 인간의 희로애락을 그려낸다. 피나의 연출이 장르를 넘나들다보니 음악도 종합선물세트다. 미니멀·카바레풍 가요·민요·바로크 가곡·일렉트로닉. 한마디로 춤을 출 수 있는 모든 곡이 다 들어 있다.
 
‘Lillies of the valley’는 여러 개의 베이스 악기로 시작한다. 반복되는 음형 위로 긴장감 있는 피아노와 기계음이 맛을 더한다. 중반부에 잠시 아련한 멜로디로 변하는 듯하다가 뒤로 가면서 기계음이 만드는 긴장감이 덧붙는다. 영화에서는 푸른 정원에서 무용수들이 의자를 넘어가는 장면과 이어지는 피나 바우쉬의 ‘Vollmond’ 공연과 어우러져 사용된다.
 
이어지는 곡은 ‘Bahamut’인데 카바레풍이다. 영화 속에서 속옷만 입은 남자가 강박적으로 동작을 반복한다. 동작이 좀 거칠어 보이지만 이 투박함도 하나의 연출이다. 여러 명의 여자 앞에서 별 볼일 없는 남자가 구애하듯 춤을 춘다. 우스꽝스럽다. 그러나 남자가 너무 진지해 점차 웃음기가 사라진다.
 
‘La Prima Vez’라는 곡은 유태인의 민속음악이다. 화장이 번져 얼룩덜룩해진 여자가 혼자서 춤을 춘다. 민속음악이 그렇듯 같은 멜로디가 반복되는데 우리의 아리랑처럼 애틋하다. 중간에 흘러나오는 유태인들의 전통 현악기 간주가 애잔하다. 2절이 시작되면 가수는 노래에 기교를 넣어 서러운 감정을 끓어 올린다.
 
도로 한복판에서 남녀가 춤추는 장면에 나오는 곡은 ‘My one and only love’다. 유명한 재즈곡과는 다른 곡이다. 차가 많은 교차로에 여자가 앉아 음악을 튼다. 남자가 다가와 둘은 로맨틱한 춤을 춘다. 차들이 다니거나 말거나, 모노레일이 지나가거나 말거나 그들은 봄날의 햇빛 아래 한 곳을 바라본다.
 
춤과 음악은 형제다. 인간의 DNA에 각인된 공통코드다. 서너 살 어린 아이들을 보면 알 수 있다. 어디서건 쿵쿵거리는 비트만 흘러나오면 몸을 들썩인다. 본능적으로 춤과 음악을 외면하지 않는 그들은 어른보다 더 행복한지도 모르겠다.
 
 
글 엄상준 TV PD 90emperor@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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