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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젠 하늘이 굴리는 대로 살 거야

중앙선데이 2017.12.03 01:00 560호 29면 지면보기
삶과 믿음
오일장은 오늘도 인산인해. 한적하고 여유로운 산촌을 좋아하지만, 대형마트보다 싼 갖가지 찬거리를 사러 아내 따라 나선 풍물시장. 모처럼 날씨가 포근해서일까. 발 디딜 틈 없이 붐비네. 뒤에서 밀면 앞으로 한 걸음 떠밀려 가고 앞 사람이 멈추면 나도 걸음을 멈춰야 한다. 생선가게 앞의 생선 비린내는 정말 싫지만, 생선가게 지나 풋풋한 나물이나 토종약초 같은 걸 파는 가게 앞에 오면 오래 밀려 있어도 괜찮아, 괜찮아. 사지도 않으면서 이런저런 토종 약초를 들고 킁킁 냄새 맡는 것도 좋아하니까.
 
넓은 시장을 천천히 한 바퀴 돌고 나면 골동품 가게. 오늘 따라 눈에 들어온 건 나무요강. 변소가 바깥에 있어 평소 스텐으로 된 요강을 사용하는 나는 이런 오래된 요강에 관심이 많다. 골동품상 주인은 내가 요강 앞에서 기웃거리자, 조선시대 가마 타고 다니던 양반집 마님들이 쓰던 거라고 입에 거품을 물지만, 나는 그게 모조품이란 걸 알지. 뚝딱뚝딱 쇠망치 소리 요란한 대장간 앞을 지나면 옛날 떡집. 날씨 포근할 땐 난전에 앉아 인절미를 썰어 팔던 호호백발 할머니. 오늘은 유리문 안에서 인절미를 빚고 계신다. 둥글고 길게 만든 찹쌀반죽을 칼로 뚝딱뚝딱 썰어 팥고물에 묻히기도 하고 콩고물에 묻히기도 하시네. 한참 동안 호호백발 할머니가 인절미 빚는 것을 보다가, 나는 문득 손뼉을 쳤다. ‘그래, 바로 저거야. 이젠 떡집 할머니 손길에 저를 내맡긴 인절미처럼 살 거야. 콩고물에 굴리면 콩인절미로, 팥고물에 굴리면 팥인절미로! 누가 뭐라 해도 이젠 하늘이 굴리는 대로 살 거야. 그럴 거야.’
 
풍물시장을 휘돌아 집으로 돌아오며 아내에게, 이젠 하늘이 굴리는 대로 살겠다고 하니, 빙그레 웃으며 대꾸한다. 아마도 당신이 남보다 가진 게 많았으면 그런 생각을 못했을 거예요! 그래, 당신 말이 맞아. 가진 게 많아 자식에게 물려줄 유산이라도 있었으면 그걸 지키려 아등바등했겠지. 요새 종교 세습이니 뭐니 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신도들의 피 같은 헌금으로 축적된 재산을 자기 소유인 양 그걸 지키려 하기 때문이 아니겠는가.
 
인도의 성자 간디가 ‘바가바드 기타’를 해설하며 한 말이 문득 떠오른다. “신은 우리를 명주실로 이끄신다.” 왜 하필 명주실일까. 어릴 적 누에를 키워 본 적이 있어 나는 누에가 토해 내는 명주실이 얼마나 가는지 잘 안다. 만일 신이 명주실로 우리를 이끄실 때 우리가 어떤 욕망에 사로잡혀 신의 이끄심을 거부한다면, 그 가느다란 실은 금방 끊어지고 말 것이다. 에고의 욕망을 텅 비울 때만 우리는 신의 인도를 받을 수 있는 것. 종교적 삶의 최고 미덕은 ‘순종’이 아니던가.
 
나는 내가 ‘적수공권’으로 살게 된 것을 고마워한다. 적수공권은 맨손과 맨주먹이라는 뜻으로 가진 게 없다는 걸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 하지만 나는 만물의 주인인 우주의 주재를 모셨으니, 모든 것을 가진 은총을 누리는 것이 아닌가. 내가 풍물시장에서 만난 호호백발 할머니 손에 빚어지는 인절미처럼 살겠다는 건 우주의 주재를 모신 기쁨의 표현에 다름 아닌 것이다.
 
 
고진하 목사
1987년 『세계의 문학』으로 등단. 김달진 문학상과 영랑시문학상을 수상했다. 현재 원주 한살림 교회를 섬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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