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무정』이후 100년의 교훈, 인본주의

중앙선데이 2017.12.03 01:00 560호 30면 지면보기
Outlook
하늘의 별을 보고 삶의 지도를 삼을 수 있던 시대, 그리고 그 별빛이 삶의 앞길을 밝혀주던 시대의 사람들은 얼마나 행복했던가. 이 문장은 리얼리즘 문예이론의 교조(敎祖)로 통하는 헝가리 태생의 문학사가(文學史家) 게오르그 루카치(1885~1971)의 것이다. 그의 나이 스물아홉에서 서른 사이의 젊은 날에 쓴 유명한 저술 『소설의 이론』 서두다. 그가 말하는 ‘역사철학적’ 행복론은 하늘의 별빛과 인간 내면의 불꽃이 동일하던 시대, 이상과 현실이 일치하던 시대의 삶을 지향한다. 그러한 시각으로 제1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을 중심으로 한 세계사의 흐름과 소설 장르의 형식을 결부하여, 양자가 함께 나아가는 방향성을 설명했다.

『동백꽃』~『채식주의자』 문학사
인간중심주의 징검다리로 연결
『『
정치·경제·사회 일반에서도
‘사람 소중히’ 정신 살아있다면
문학 100년 교훈 헛되지 않을 것

 
루카치는 소설이 현실을 총체적으로 반영해야 하고 또 작품 속의 ‘문제적 인물’과 더불어 그 사회의 개선에 복무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에게 있어 문학은 단순한 여기(餘技)나 향유의 대상이 아니라 시대와 역사에 대한 신념이요 그 발화였다. 『소설의 이론』 말미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단 한 편의 소설도 쓰지 않았다고 매우 도전적으로 쓴 것은, 그의 소설이 과거와 달리 꿈과 삶의 동화(同化)를 향한 전혀 새로운 차원을 담보해야 한다는 당위성을 내세운 것이었다. 하지만 도스토옙스키는 물론 서구와 세계 역사의 흐름이 루카치의 예언을 충족시키지 않았다. 그가 갈망했던 문예이론의 바탕으로서 마르크시즘은 100년간의 형식실험 끝에 종언을 고했다.
 
그러나 이 고매하고 돌올한 이론가가 시종일관 붙들고 있던 시대사와 문학의 상관성은 양(洋)의 동서와 시(時)의 고금을 넘어 오늘에 이르러서도 여전히 강력한 시사점을 환기한다. 한국 현대문학 100년의 시발을 알린 이광수의 장편소설 『무정』이 발표된 지 꼭 100년이 지났고 이제 그 한 세기의 마지막 월력을 남겨두고 있다. 그동안 이 역사과정에 명멸한 시대적 사건과 문학작품은 부지기수이지만, 가장 선이 굵고 뚜렷한 항목들을 선별하여 살펴보는 것이 뜻이 깊어 보이는 때가 되었다. 이는 프랑스의 작가 아나톨 프랑스의 표현처럼, 문학사는 걸작들을 징검다리로 하여 형성된다는 시각을 반영하는 것이기도 하다. 다만 그 과정에 개재된 공통의 시대정신(Zeitgeist)이 무엇인가를 도출하는 일이 중심과제다.
 
개화세대에 있어 그 시대의 풍경과 욕구를 새롭게 반영하면서, 민족의 교사를 자처했던 작품이 이광수의 『무정』이다. 1917년 1월부터 6월까지 모두 126회에 걸쳐 매일신보에 연재된 한국 최초의 본격 장편소설이다. 민족주의와 인도주의에 입각하여 자아각성과 계몽의식을 앞세운 순 한글문체로 되어 있다. 그야말로 근대 이래의 기념비적 작품이며, 이러한 문학적 성과에 비추어 볼 때 만약 이 작가에게 친일행각이 없었더라면 단연 ‘근대문학의 아버지’란 호명이 공여되었을 것이다. 이 소설의 주요한 네 인물은 근대성을 구체적으로 표방하는 동시에 그 내면에 있어서는 인간을 소중하게 여기는 인본주의 사상으로 충일했다.
 
다음 단계에서는 일제강점의 심화와 탄압의 강화로 역사공간 또는 자연친화의 글쓰기로 도피한 문학적 산물을 볼 수 있다. 특히 시대현실과의 단절과 더불어 서정성의 확대 및 언어의 조탁에 몰두한 작품으로 김유정의 『동백꽃』, 이효석의 『메밀꽃 필 무렵』 같은 소설 그리고 정지용, 김영랑 등 시문학파 시인들의 시가 대표적이다. 이 시기를 넘어 광복과 6·25동란의 격동기를 거치면서 이에 대응하는 많은 작품들이 산출되었다. 옛 시 평설의 한 구절처럼 ‘국가불행시인행(國家不幸詩人幸)’의 면모가 넘쳤다. 이 무렵의 대표적인 작품인 황순원의 『나무들 비탈에 서다』를 보면, 삶의 환경이 험난하고 각박할수록 문학은 오히려 더 인간의 존엄성을 부양하는 형국이다. 문학이 곧 인간학인 셈이다.
 
그다음 산업화와 민주화 운동기에 이르러 문학사의 한 획을 그은 작품이 황석영의 『장길산』이다. 한 걸출한 영웅의 활동에 의지해서가 아니라 당대를 살아가는 여러 민중세력의 연합에 의해 새 세상을 꿈꾸는 이야기다. 그 핵심을 요약하면 인간중심주의다. 오늘날 다양성과 다원주의의 시대에 가장 주목을 받는 한강의 『채식주의자』를 일별해 보아도 이 주제를 능가하는 개념은 찾기 힘들다. 『무정』 이래 100년에 이른 한국문학사는 결국 인본주의 사상을 표방한 작품들을 징검다리로 하여 한 세기를 구성했다.  
 
비단 문학에서만 그렇겠는가. 온 세상에 사람보다 앞서는 것은 없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 일반에서도 그렇게 사람 자체를 소중히 여기는 정신이 별빛처럼 살아있다면, 100년 문학의 교훈이 결코 헛되지 않을 것이다.
 
 
김종회
문학평론가·경희대 교수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