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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예술 - 미술] 추상, 말없는 대화

중앙일보 2017.12.02 01:19 종합 31면 지면보기
이지은 명지대 교수·미술사학

이지은 명지대 교수·미술사학

미술사에서 추상 회화를 설명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 아니다. 대상을 재현하던 회화는 사진의 등장 이후 닮게 그리는 것보다 붓질과 색채를 통해 화가의 개성을 표현하는 데 몰두했다. 회화는 평평한 캔버스에 배열된 색면으로 정의되고, 재료의 물성(物性)과 화가의 몸짓이 그림 내용이 됐다.
 

아트비트 갤러리 ‘임의의 지점’

반면 개개의 추상 회화를 설명하기란 힘들다. 작가의 삶이나 미술 양식은 눈앞의 그림을 설명하는 데 불충분하다. 아무것도 묘사하지 않고 어떤 메시지도 드러내지 않는 추상은 언어의 능력 밖에 있다. 이런 형언할 수 없는 추상이 ‘임의의 지점’(내년 1월 18일까지 아트비트 갤러리)에서 만나는 세 작가에겐 한계가 아니라 가능성이다.
 
전영희의 ‘숨’에는 수직으로 길게 그은 선이 반복된다. 위아래로 양분된 화면에서 조금씩 어긋나게 맞닿은 선들은 각기 다른 굵기와 간격으로 늘어섰다. 우리의 지각작용으로 물감이 닿지 않은 표면에 달무리처럼 빛이 번진다. 회화를 이루는 물질이 시각적 환영으로 바뀌는 순간이다.
 
오늘날 한국 추상회화의 폭과 깊이를 보여주는 전영희의 ‘숨’(사진 위)과 김춘수의 ‘울트라-마린’.

오늘날 한국 추상회화의 폭과 깊이를 보여주는 전영희의 ‘숨’(사진 위)과 김춘수의 ‘울트라-마린’.

김춘수의 ‘울트라-마린’을 보자. 유화지만 수묵화처럼 농담(濃淡)이 있다. 짙고 엷은 청색이 중첩된 화면은 미묘하게 일렁인다. 가장자리에 언뜻 보이는 흰색은 깊이를 알 수 없는 화면에 숨통을 틔우고 캔버스라는 물리적 한계를 넘어 회화의 공간을 확장한다. 작가는 붓질을 하지 않았다. 더듬 듯 손으로 물감을 바른다. 사람의 손을 탄 화면은 내부에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를 암시하는 에너지로 꽉 차 있다.
 
장승택은 합성수지 오브제를 캔버스 삼아 스프레이로 수십 차례 유성 물감을 분사한다. 다양한 색조가 겹쳐진 표면은 무채색으로 마무리되는데, 이때 바탕색이 보일 듯 말 듯 표면에 배어난다. 조명을 받아 살갗처럼 오묘하게 변한다. 작품은 우리를 마주보는 존재로 우리 앞에 선다.
 
이들 작업이 드러내는 것은 회화의 공간이다. 평평한 캔버스라는 물리적 존재가 아니라 시각적 상상력이 만드는 세계. 아무것도 묘사하지 않기에 모방도 재현도 아닌 언어 이전의 공간이다. 감각이 반응하고 마음이 무장해제되는 가능성의 세계에 머물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찰나에 불과할지라도 벅찬 일이다. 경솔한 말들이 난무하는 세상에 속한 우리가 잠시나마 말을 잊을 수 있는 완벽한 세계다.
 
이지은 명지대 교수·미술사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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