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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안 기름 유출 때 위로 대신 우울증 강연, 멱살 잡힐 뻔했지요

중앙일보 2017.12.02 01:00 종합 16면 지면보기
해양 오염, 세월호, 경주·포항 지진 … 대형 재난 현장엔 항상 그가 있었다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이 사무실에 걸린 지도에서 지진 지역을 가리키고 있다. 이 원장은 경주에 이어 포항의 심리지원 총괄을 맡고 있다. [사진 국립부곡병원]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이 사무실에 걸린 지도에서 지진 지역을 가리키고 있다. 이 원장은 경주에 이어 포항의 심리지원 총괄을 맡고 있다. [사진 국립부곡병원]

지난달 15일 오후 2시29분. 경북 포항에서 규모 5.4의 지진이 발생하던 시각, 경남 창녕의 국립부곡병원도 심하게 흔들렸다. 사무실에 있던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도 큰 떨림을 느꼈다. ‘준비해야겠구나’. 그 생각이 퍼뜩 들었다. 곧바로 누가 포항에 갈지, 어떻게 갈지 알아봤다. 그러고는 현장을 파악해 보라고 직원을 보냈다. 다음 날 전문의·간호사·사회복지사 등으로 구성된 ‘포항 현장심리지원단’이 정식으로 꾸려졌다. 포항 현장 총괄을 맡은 그는 “재난 현장에 10년째 나가다 보니 자동 반사처럼 몸이 먼저 움직인다”고 말했다.

이영렬 재난 심리지원 전문가
재난은 사람 마음에 공포 쓰나미
그냥 두면 트라우마로 깊은 절망

보이지 않아 더 두려운 지진 후유증
상담자, 창문만 약간 흔들려도 깜짝
손 잡아주며 마음 잡을 수 있게 설득

곁에 있어 주는 것만으로도 큰 힘
누가 어떻게 어디까지 해야 하는지
국가 차원 정밀한 매뉴얼 만들어야

 
태안 기름 유출 사고(2007년), 세월호 참사(2014년), 경주 지진(2016년), 그리고 포항 지진. 최근 10년 새 국내에서 발생한 대규모 재난 현장에 이영렬(정신과 전문의) 원장이 있었다. 정부의 심리 지원을 책임지는 역할은 대부분 그의 몫이다. 포항에서도 2주 넘게 트라우마 예방을 위한 심리 상담, 고위험군의 의료기관 연계 등을 도맡고 있다.
 
재난은 쓰나미처럼 마음을 휩쓴다. 처음에는 고함과 혼란, 분노로 가득하지만 점점 우울·비관 등으로 옮아간다. 불면증이 나타나고 자꾸 살이 빠지거나 몸이 여기저기 아프다. 심하면 외상후스트레스장애(PTSD)로 발전해 깊은 절망에 빠진다. 왜 그럴까. 이 원장은 “재난을 당하면 재난 그 자체에서 먼저 충격을 받고, 다음에 여러 충격이 겹치게 된다. 집이 망가지거나 몸을 다치게 되면서 이런 게 한꺼번에 마음을 후벼 팔 때가 많다”고 말한다.
 
그래서 체계적인 심리 지원이 필요하다. 지진의 공포는 다른 재난과 좀 다르다. 태풍·화재·수해 등은 눈에 보이지만 지진은 보이지 않으니 두려움이 커진다. 특히 생활 속 진동이나 갈라진 건물 같은 지진의 흔적이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PTSD를 악화시킨다.
 
지난해 경주에선 공사 현장에서 ‘드드드’ 진동이 난다고 주민들이 항의하기도 했다. 포항에서도 금이 간 벽을 보기 싫다고 집에 돌아가길 거부하거나 휴대전화 진동 소리에 깜짝 놀라는 사람이 있다. 지진 당시의 뉴스 영상도 스트레스다. “상담 도중 창문이 바람에 흔들렸는데 어르신이 움찔 놀라더군요. 한두 명만 그런 게 아닙니다. 많은 주민이 지진의 공포에서 헤어나지 못해요.”
 
이영렬 원장은 지난 10년간 주요 재난 현장에서 피해자의 마음을 보듬는 일을 도맡아 왔다. 왼쪽부터 기름 덮인 태안 해변, 경주 심리 교육, 포항의 피해 현장, 포항 주민을 상담하는 모습. [사진 국립부곡병원, 중앙포토]

이영렬 원장은 지난 10년간 주요 재난 현장에서 피해자의 마음을 보듬는 일을 도맡아 왔다. 왼쪽부터 기름 덮인 태안 해변, 경주 심리 교육, 포항의 피해 현장, 포항 주민을 상담하는 모습. [사진 국립부곡병원, 중앙포토]

다른 재난과 달리 지진은 한 번으로 끝나지 않는다. 여진 때문이다. 1일 오전에도 포항에서 규모 2.4의 지진이 발생했다. 규모 2.0 이상의 여진만 68회 발생했다. 이런 상황이 이어지면 대개 분노나 우울로 표출된다. “다 나 때문이야”라면서 자신을 비난하거나 “저놈이 죽일 놈”이라며 외부에 칼날을 세우는 식이다. 특히 아픈 사람이나 저소득층 등 취약계층은 현재의 어려움에 지진까지 겹치면서 ‘왜 나만 그래’라는 생각에 죽음을 떠올리기도 한다.
 
이런 일이 벌어지지 않게 병원으로 안내해 치료를 돕는다. 포항에서만 351명이 병원으로 갔다. 또한 독거노인 집과 이재민 텐트 등을 직접 방문해 그들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한 명당 상담 시간이 평균 20분이다. 충격이 크지 않은 사람은 상담·교육을 거쳐 재난 현장으로 최대한 빨리 돌려보내 피해를 복구하도록 한다. 복구를 빨리 마쳐야 그만큼 마음의 상처도 회복이 빨라져서다.
 
이 원장이 이끄는 포항 심리지원단은 보름 넘게 활동 중이다. 1151명(누적)이 6456건(지난달 30일 기준)을 상담했다. 언제 마칠지 알 수 없다. 마음의 상처는 상당 기간 지속된다는 점도 작용한다. 경주 지진 때는 10일간 약 1000명을 상담했다.
 
지진을 한 번 겪어도 힘든데 두 번 겪는다면? 경주에 살다가 최근 포항으로 이사 와서 연달아 지진 피해를 겪은 부부가 있다. 부부라도 충격의 크기가 다르다. 처음에는 충격을 덜 받은 쪽이 공포를 호소하는 배우자를 위로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짜증이 났다. 피해자는 “이런 내가 싫다”면서 점점 우울해졌다.
 
이 원장이 개입했다. “딱 1년만 옆에서 참고 기다려주면 남은 인생을 고마워하면서 살 것이다”고 설득했다. 그랬더니 부부의 얼굴이 확 밝아졌고 “고맙다”며 감사의 뜻을 표했다고 한다. 이 원장이 아니었다면 부부 사이에 어떤 일이 벌어졌을지 모를 일이다.
 
여러 재난 현장을 거치다 보니 국내에서 손꼽히는 재난 현장 베테랑이 됐다. 이렇게 되기까지 이 원장도 아픔을 겪었다. 재난 심리 지원이 뭔지 아무도 모르던 2008년 1월, 이 원장은 정신과 전문의라는 이유로 태안에 급파됐다. 기름 유출로 피해를 본 주민들을 마을회관에 모아놓고 우울증에 대해 설명했다. 그는 “우울증을 치료하면 된다고 쉽게 생각했는데 주민들의 눈에는 ‘우울증 의학 강연’처럼 보였나 봐요. 주민들이 화를 내면서 멱살잡이 직전까지 가 쫓겨 나왔다”고 말했다.
 
이 원장은 10년간 재난 심리 지원의 중요성에 대한 우리 사회의 인식이 나아졌지만 여전히 전문성 등에서 부족한 점이 많다고 본다. 이를 해소하려면 정부 차원의 ‘재난 심리 지원 가이드’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심리 지원을 어디까지 해야 하고, 정확한 역할은 무엇이며, 누가 해야 하는지 기준이 있어야 한다. 현장 상황이 충실히 반영된 신뢰성 있는 국가 재난 심리 서비스의 틀을 갖추는 게 앞으로의 목표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재난을 겪은 피해자에게 평소 제일 절실한 건 뭘까. 이 원장은 “옆을 지켜주는 것”이라고 말한다. 정부 지원도, 전문가 조언도 필요하지만 가족·친구·이웃의 따뜻한 사랑과 관심이 최고라는 의미다. “재난으로 어려움을 겪는 분이 언제 회복될지는 모르지만 주변에서 성원하고 지켜주고 끝까지 도와주면 그리 길지 않을 거라고 봅니다.”
 
[S BOX] 이 또한 지나가리라 … 트라우마엔 시간이 묘약
‘이 또한 지나가리라’. 이영렬 국립부곡병원장이 재난 트라우마 극복을 위해 강조하는 제1원칙이다. 사람은 자기 치유력이 있기 때문에 시간이 지나면 웬만한 정신적 어려움은 이겨 낼 수 있다고 한다. 미국에 깊은 트라우마를 남긴 9·11 테러도 피해자의 90%가 1년 만에 원상태로 회복됐다. 이 원장은 “피해자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면 고비를 잘 넘길 수 있다”고 말했다.
 
이는 포항 지진으로 마음까지 흔들린 피해자들에게 똑같이 적용된다. 혼자서 골똘한 생각에 빠지면 놀라움·두려움이 우울·비관 등으로 악화된다. 이 원장은 “피해자들이 혼자 생각하면 절대 좋은 생각이 나지 않는다.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앞날에 대한 걱정에 빠지기 쉽다”고 지적했다. 이를 피하려면 스스로 잡념에 잠기기보다 가급적 나가서 몸을 움직여야 한다고 조언한다. 그냥 생각 없이 걷고, 사람을 만나다 보면 자연스레 충격이 줄어든다.
 
억지로 일상생활을 지속하면 어느 순간 머릿속에서 지진의 충격이 사그라진다. 예를 들어 드라마 연속극을 꾸준히 챙겨 봤다면 그걸 이어서 보는 식이다. ‘지진이 왔는데 무슨 약속이야’라고 생각하지 말고 친구 모임, 골프·운동 약속 등 각종 스케줄에 더 악착같이 참여해 즐거움을 얻는 게 좋다. 이 원장은 “지진 피해자들에게 일상의 소중함을 알리면서 자신감을 불어넣는 이야기를 가장 많이 한다”고 말했다.
 
정종훈 기자 sakehoo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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