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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속으로] 난후 호반 이 작은 배 앞에서, 시진핑은 ‘초심’을 외쳤다

중앙일보 2017.12.02 01:00 종합 17면 지면보기
13억 대륙 이끄는 중국 공산당의 뿌리
중국 공산당은 작은 유람선 위에서 탄생했다. 마오쩌둥 등 공산당 초기 당원들은 1921년 8월 2일 저장성 자싱시 난후에서 관광객으로 가장한 채 선상회의를 열어 창당선언문을 통과시켰다. 사진은 1959년 복원돼 난후에 보관 중인 ‘홍선’. [예영준 특파원]

중국 공산당은 작은 유람선 위에서 탄생했다. 마오쩌둥 등 공산당 초기 당원들은 1921년 8월 2일 저장성 자싱시 난후에서 관광객으로 가장한 채 선상회의를 열어 창당선언문을 통과시켰다. 사진은 1959년 복원돼 난후에 보관 중인 ‘홍선’. [예영준 특파원]

# 2017년 10월 31일. “기율을 엄수하고 비밀을 지키며 … 언제라도 당과 인민을 위해 모든 것을 희생할 준비를 갖추고 영원히 당을 배반하지 않겠습니다.”

마오쩌둥과 12인 상하이 집결
창당대회 하려다 경찰이 급습
간발 차로 자싱의 난후로 피신

유람선 빌려 마작판 위장
1921년 8월 2일 배 위에서 창당
38년 뒤 혁명의 상징 ‘홍선’ 복원

‘중국몽’ 실현 다짐한 시진핑
“시작은 간단했으나 마칠 땐 크게”
세계 최강국 될 때까지 분투 독려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주석이 불끈 쥔 오른 주먹을 들어올리고 선창하자 리커창(李克强) 총리 이하 6명의 상무위원들이 우렁한 목소리로 복창했다.
 
중국의 최고권력자 7명이 입당선서를 한 이 장면은 지난달 31일 국영방송인 CC-TV의 저녁 메인뉴스 시간에 방송됐다. 놀라운 것은 장소가 베이징이 아니라 상하이였다는 점이다. 중국 당 서열 1위부터 7위까지의 최고지도부가 단체로 지방 나들이를 하는 건 만일의 사태나 경호 문제를 생각하면 어지간한 일로는 감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시 주석이 21세 청년이던 1974년 공산당에 입당한 건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리 총리를 비롯한 나머지 상무위원들의 당력(黨歷)도 모두 40년 안팎에 이른다. 그런 그들이 수십년 전 청년 시절의 입당선서를 반복하며 ‘초심(初心)’을 되새긴 이유는 무엇일까.
 
시 주석 일행의 동선을 살펴보면 그 해답을 찾을 수 있다. 시 주석이 주먹 쥐고 선서를 한 곳은 상하이의 공산당 제1차 전국대표대회, 즉 창당 대회 유적지다.
 
상하이 방문을 마친 이들은 인근 도시인 저장(浙江)성 자싱(嘉興)의 난후(南湖) 호반으로 향했다. 그러고선 호수에 떠 있는 한 척의 배를 바라보았다. 도대체 이 배와 ‘초심’사이에 무슨 연관이 있는 것일까.
 
중국 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 폐막 일주일 만인 10월 31일, 시진핑 국가주석을 비롯한 상무위원 전원이 96년 전 창당선언문 채택 장소인 저장성 난후를 찾아 홍선을 관람하고 있다. [자싱=신화]

중국 공산당 제19차 전국대표대회 폐막 일주일 만인 10월 31일, 시진핑 국가주석을 비롯한 상무위원 전원이 96년 전 창당선언문 채택 장소인 저장성 난후를 찾아 홍선을 관람하고 있다. [자싱=신화]

# 1921년 7월 23일. 일단의 젊은이들이 상하이의 프랑스 조계(租界·외국인 거주지)의 한 건물에 잠입했다. 중국 공산주의 운동의 선구자격인 천두슈(陳獨秀)와 리다자오(李大釗) 등이 공산당 창당 대회를 갖기 위해서였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의 성공 이후 공산주의 혁명이 반봉건 반식민지 상태의 중국을 구원할 것이라는 사조가 중국 청년 지식인들 사이에 급격히 퍼지면서 각 지방 별로 사회주의 학습 조직이 만들어졌다. 이를 공산당으로 조직화하라는 게 코민테른의 지령이었다. 그렇게 모집된 당원 수는 중국 대륙을 통틀어 57명, 그중 지역별 대표 13명이 상하이에 모였다. 후난(湖南) 대표인 마오쩌둥도 그 속에 포함됐다. 창당 작업을 지도하기 위해 코민테른이 파견한 H. 마링도 합류했다.
 
회의는 순조롭지 못했다. 치외법권 지역인 조계라고 해도 공산당이 불법이기 때문에 공안당국의 눈을 피해야 했기 때문이다. 일주일 만인 30일 불안한 조짐이 현실로 나타났다. 낯선 청년들의 거동을 수상히 여긴 누군가가 동정을 살피며 꼬치꼬치 캐묻고 돌아간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조계 경찰이 급습했다. 간발의 차이로 창당대회 대표들이 모두 현장을 떠난 뒤였다.
 
13명 가운데 일부를 뺀 창당 대표들이 다시 모인 곳은 자싱의 난후였다. 건륭(乾隆)황제가 즐겨 찾았다는 연우루(煙雨樓)를 비롯, 빼어난 풍광으로 사시사철 유람객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 곳이었다. 이들은 소형 유람선 한 척을 대절해 난후에 띄웠다. 배 안의 탁자 위에 술판을 벌이고 마작패까지 펼쳤으니 행색은 영락없는 관광객이었다.
 
경찰의 눈을 피해 온 당 대표들은 이 배 안에서 창당선언문과 당 강령을 통과시켰다. 중국 공산당은 그렇게 한 척의 작은 배 위에서 탄생했다. 오늘날 당원 수만 8900만 명을 헤아리는 거대 정당의 뿌리는 10인승 남짓의 작은 유람선이었다. 1921년 8월 2일의 일이었다. 지금 중국 공산당이 해마다 7월 1일을 창당 기념일로 삼고 있는 건 이렇듯 쫓기면서 이뤄진 선상 창당의 정확한 시기를 항일전쟁과 국공내전의 와중에서 제대로 고증해 내지 못한 탓이다.
 
중국 당국은 1959년 이 배를 복원해 96년전의 그 자리인 난후의 선착장에 띄워 놓고 보존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과 혁명의 상징색을 본 따 ‘홍선(紅船)’이라 불린다. 폭 3m, 길이 16m의 작고 평범한 외양이다.
 
앞서 시 주석 일행은 상하이의 창당대회 유적지에서 입당선서를 재연했다. [상하이=신화]

앞서 시 주석 일행은 상하이의 창당대회 유적지에서 입당선서를 재연했다. [상하이=신화]

# 다시 2017년 10월 31일. 입당선서를 재연한 시 주석 일행이 난후로 달려가 관람한 건 바로 이 홍선이었다. 그러고 나서 시 주석은 인근의 ‘난후 혁명기념관’을 찾아가 일장 연설을 했다. 요지는 초심을 잃지 말자는 ‘불망초심(不忘初心)’이었다. 그는 “창당 이래 96년간 우리 당은 세계가 괄목할 만한 위대한 성취를 했고 이는 자부심을 가져도 될 만하다. 하지만 우리의 사명은 끝이 없기에 초심을 잃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지금까지의 성취에 도취돼 남은 사명을 잃지 말자는 의미였다. 그가 말한 사명이란, 19차 당 대회에서 밝힌 대로 2050년 종합국력 선두의 최강대국이 되는 ‘중국몽(中國夢)’의 실현에 다름 아닐 것이다.
 
시 주석이 다녀간 뒤 난후를 찾는 관광객이 부쩍 늘었다. 중국 혁명 유적지를 답사하는 이른바 ‘홍색 유커(紅色遊客)’의 발길이 난후로 향한 것이다. 11월 중순 기자가 이곳을 찾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시 주석이 다녀간 후이징위안(會景園) 선착장에 홍선을 옮겨 놓고 지방 간부들이 19차 당대회 결정을 실천하자는 결의 행사 준비가 한창이었다. 공산당원이라고 밝힌 40대 여성은 낫과 망치 등 상징물이 큼직하게 새겨진 연단 앞에서 선서 자세를 취하며 기념촬영을 했다.
 
상하이, 자싱시

상하이, 자싱시

“그 시작은 간단했으나 마칠 때에는 반드시 크게 된다.” 시 주석이 홍선을 관람한 뒤 연설에서 인용한 구절이다. 얼핏 성경 구절을 연상케 하지만 실은 장자(莊子) 인간세(人間世) 편에 나오는 것이다. 그가 말한 시작은 당원 57명, 창당 대회 대표자 13명의 지하 불법 정당이었다. 경찰의 눈을 피해 호수 위에서 유람선을 띄우고 창당선언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 정당이 지금 G2의 반열에 올라선 13억 인구의 중국 대륙을 통치하는 거대정당이 되었다. 하지만 시 주석은 여기에서 만족하면 안 된다고 끊임없이 되뇌인다. 세계 최강대국의 반열에 오르는 중화민족의 부흥이 이뤄질 때까지 ‘초심’을 잃지 말고 끝없는 분투를 독려한다. 중국의 지도자가,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수많은 중국의 장삼이사(張三李四)들까지 홍선을 관람하며 ‘중국의 꿈’ 실현을 다짐하고 있다. 이웃 나라의 나그네가 안개비 내리는 난후에 떠 있는 작은 배 한 척을 무심코 지나칠 수 없었던 이유다.
 
[S BOX] 난후 배 위에서 임정 회의 … 11년 뒤 백범, 판박이 도피 행로
마치 중국 공산당의 그림자를 밟듯 상하이에서 자싱 난후로의 도피 행로를 따른 사람이 있다. 다름 아닌 백범 김구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이끌던 백범은 1932년 상하이 프랑스 조계의 임정 청사를 버리고 자싱의 난후 호반으로 도피했다. 난후에 띄운 배 위에서 이동녕·엄항섭 등 임정 요인들과 비밀 회의를 열고 독립운동의 방향을 결정했다. 11년의 시차를 두고 마오쩌둥 등 공산당원들의 행적을 그대로 따른 셈이다.
 
백범이 활동하던 상하이 조계의 임정 청사는 중국 공산당 대회 유적지와 불과 400m 거리, 큰 길 하나를 사이에 둔 지척에 있다. 백범은 1932년 윤봉길 의사 의거를 계기로 시작된 일본 경찰의 무차별 검거선풍을 피해 이곳을 버리고 도피 길에 올랐다. 백범은 중국 국민당이 주선해준 자싱의 항일애국인사 주푸청(褚輔成)의 집에서 2년 이상 숨어지냈다. 메이완루(梅灣路)의 운하에 있던 백범의 피난처는 난후와는 수로로 연결돼 있고 직선거리로는 1㎞ 남짓 밖에 안 된다. 주푸청은 백범이 언제라도 수로로 도피할 수 있도록 숙소와 연결된 운하에 쪽배를 대기시켜 주었다. 백범은 이곳에 머물며 자신을 찾아온 이동녕·엄항섭 등과 선상에서 임시의정원 회의 등을 열었다. 당시 행적은 백범일지에 비교적 소상하게 기록되어 있다.
 
자싱(저장성)=예영준 특파원 yyjune@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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