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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속으로] 얌전해 보이지만 처절한 사연 내장 … 고은 시인 “단언한다, 소리 없는 절창”

중앙일보 2017.12.02 01:00 종합 24면 지면보기
문학이 있는 주말
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

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

그늘진 말들에
꽃이 핀다
박신규 지음, 창비
 
‘이 시편들을 읽는 한나절 내 내 겨드랑이 몇 번이나 떨렸다 (…) 단언한다. 소리 없는 절창의 하나이다.’
 
시집 뒤표지 ‘추천사’라는 형식의 글이 대개 그렇듯, 덕담 같은 과장인가. 아니면 냉정한 계량인가. 추천사를 쓴 이는 고은 시인, 그가 극구 칭찬한 시집의 지은이는 박신규(45) 시인이다. 30대 후반부터 시 발표를 시작한 ‘무명 시인’ 박씨의 첫 번째 시집이다.
 
절창(絶唱)은 빼어나게 잘 지은 시나 노래라는 뜻, 뭔가 가슴을 쿡쿡 찔러 쑤시게 한다는 것. 시집 안에 가지런히 실려 있는 60편은 추천사가 과장이 아니라고 항변하는 것만 같다. 무심히 흘려보낼 수도 있겠지만 마음을 실어 읽다 보면 겨드랑이든 어디든 건드린다. 시집 제목에서 느껴지는 것처럼 서늘한 아름다움, 얼핏 얌전해 보이지만 처절하고 기막힌 사연을 내장한 시편들이다.
 
‘들별꽃’은 노골적으로 읽는 이의 눈물을 요구할지 모른다. 울고 울고 또 우는 얘기, 커다란 슬픔 앞에서도 살아남으려면 먹어야 해서, 먹으면 토가 나오는데도 어쩔 수 없이 먹고 그러다 토하고 다시 우는 얘기다.
 
‘들별꽃’에 감정이 소진돼 덤덤해졌다면 ‘김사인과 싸우다’로 넘어가면 어떨까 싶다. 여기서 김사인은 우리가 아는 김사인 시인 맞다. 김사인 시인을 아는 이라면 빙그레 미소 짓게 되는 작품이다. 2쪽에 걸쳐 빼곡히 실린 시를 읽고 나면 김사인 시인이 의문의 1패를 당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친다. 김사인에 대한 천연덕스러우면서도 푸근한 오마주다. 아니면 김사인으로 대표되는, 농촌정서라고 해야 할, 어떤 옛 감정과 기억의 덩어리에 보내는 시인의 연서인지도 모르겠다.
 
절창이라면 응당 그래야겠지만 박씨의 시에는 허세나 기교가 없다. 자폐적인 내면의 소통 불능과도 거리가 멀다. 마음을 다한 비유와 배치를 통해 있었던 일들, 안 잊히는 일들을 소환하고 기록할 뿐이다. 그렇게 시집에 불려 나온 것들은 제주 4·3 사건이기도 하고(‘불카분 낭’), 편집자로 일하는 출판사 사무실 풍경이거나(‘유리비행’), 서정주 『질마재 신화』에 나올 법한 어리숙하지만 진실된 사람들의 얘기다(‘지독한 사랑’).
 
‘사라진 유산’ 같은 작품에서는 은어 수박 향이 살아나는 것 같다. ‘청혼’의 수사(修辭)는 절묘하다. ‘검은 마루 붉은 빛’의 이미지는 생생하다. 시집을 읽는 동안 눈이 환했다.
 
신준봉 기자 infor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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