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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오래] 동의보감 비판한 조선 명의 이규준

중앙일보 2017.11.30 06:00
‘유의(儒醫)’란 게 있다. 조선 시대에 유학을 바탕으로 의학의 이치를 연구한 일군의 지식인을 가리킨다.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11)
포항 출신, 이제마와 근대 한의학 쌍벽이뤄
심장의 기운 부족하면 병난다는 부양론 주장
'선비에게 의술은 효를 실천하는 중요한 수단'

 
 
석곡 이규준의 초상화. [사진 포항시 제공]

석곡 이규준의 초상화. [사진 포항시 제공]

 
석곡(石谷) 이규준(李圭晙·1855∼1923)은 조선의 마지막 유의로 통한다. 마지막이면서 유의의 대미를 장식했다. 한의학계에서는 “북쪽에 이제마가 있었다면 남쪽에는 이규준이 있었다”고 말한다. 이제마는 함흥이 근거지였으며 이규준은 동해안 포항 출신이다. 석곡은 사상체질(四象體質)로 유명한 이제마(1837∼1899)와 함께 ‘근대 한의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잊힌 그를 돌아본다.
  
 
이규준이 책을 찍기 위해 제작한 인체의 5장이 그려진 장부도 목판. [사진 포항시 제공]

이규준이 책을 찍기 위해 제작한 인체의 5장이 그려진 장부도 목판. [사진 포항시 제공]

 
이규준의 의학 사상은 『황제소문대요(黃帝素問大要)』와 『의감중마(醫監重磨)』에 남아 있다. 황제(黃帝)는 공자가 ‘죽음과 삶의 이치에 통달했다’는 중국 고대의 삼황오제 중 하나다. 『황제소문대요』는 동양 의학의 경전으로 통하는 『황제내경』을 석곡이 자신의 이론에 따라 81편을 25편으로 줄여 정리했다. 4권 2책으로 1904년 저술돼 2년 뒤 밀양에서 처음 간행됐다.
  
 
박순열 증손부가 경북 포항시 동해면 석리 이규준 본가에 보관된 목판을 보여 주고 있다. [사진 송의호]

박순열 증손부가 경북 포항시 동해면 석리 이규준 본가에 보관된 목판을 보여 주고 있다. [사진 송의호]

 
이규준의 대표 학설은 ‘부양론(扶陽論)’이다. 생명의 근원은 양기(陽氣)이지만 항상 부족하기 쉽고 음(陰)은 남아돌기 때문에 양기 부족이 병의 원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모든 병은 양기를 북돋워야 낫는다는 이론이다. 양기는 또 신장이 아닌 심장에 있다고 보았다.  
 
석곡은 부양론에 따라 처방에선 온열제의 주약인 부자를 애용했다. 어린아이부터 노인에 이르기까지 양을 돕는 부자·인삼 등 조양지약(助陽之藥)을 많이 썼다. ‘이부자(李附子)’라는 별명이 붙기까지 했다.  
 
 
부양론, 기존의 의학 이론 뒤집어
 
문제는 부양론이 기존의 의학 이론을 뒤집은 새로운 패러다임이라는 점이었다. 당시 조선은 물론 동양 의학은 음을 길러 화를 내려야 한다는 원나라 주진형(朱震亨)의 자음강화(滋陰降火) 이론이 지배했다. 또 양기도 심장보다 신장에 있다고 생각했다.
 
 
이규준의 목판 중 『의감중마』에 나오는 '수족도'.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이규준의 목판 중 『의감중마』에 나오는 '수족도'. [사진 한국국학진흥원 제공]

 
『의감중마』는 이규준이 『동의보감』을 자신의 부양론에 맞게 요약한 의학 임상서다. 임상에서 실제로 부양론을 활용할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이규준은 『동의보감』의 평가에 냉혹했다. 
 
석곡은 『동의보감』이 “중국의 원·명대까지 의서를 한데 모아 병과 약을 모두 채록한 건 의학의 바다와 같다”면서도 “산만해 주장하는 바가 없다”고 꼬집는다. 결정적으로는 『동의보감』이 음을 돕고 양을 깎아 내렸다고 비판한다. 『의감중마』는 『동의보감』을 거듭 연마했다는 책 이름 그대로 부양론에 따라 『동의보감』의 치료와 처방을 재정리한 것이다.  
 
 
포항시립 석곡도서관 1,2층 벽면에 마련된 '이규준 코너'. 이규준은 이제마와 함께 '근대 한의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사진 송의호]

포항시립 석곡도서관 1,2층 벽면에 마련된 '이규준 코너'. 이규준은 이제마와 함께 '근대 한의학의 양대 산맥'으로 불린다. [사진 송의호]

 
이규준은 본래 유학자였다. 그는 의학에 앞서 유학 경전과 제자백가를 섭렵했다. 그 뒤 전국을 돌아다니며 이름난 학자를 찾아 토론을 벌였다. 고향으로 돌아와 사서오경을 위주로 공부해 40세에 깨달음을 얻고 서당을 연 선비였다.
 
병·의원이 흔치 않던 시대에 선비는 간단한 의술‧처방 공부가 ‘필수’였다. “이천(伊川, 정자 중 程頤) 선생이 말하기를 병든 사람을 시원찮은 의원에 맡기는 것은 효도하지 못하는 것이다. 부모를 모시는 사람은 반드시 의술을 알아야 한다.”『소학(小學)』에 나오는 구절이다. 선비에게 의술은 효를 실천하는 중요한 수단이었다. 이름난 선비들이 더러 의학 관련 저술을 남긴 유의가 된 배경이다. 진정한 효자가 되려면 반(半)의사는 돼야 했던 것일까.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중앙일보 객원기자 yeeho1219@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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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 현예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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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의호 송의호 대구한의대 교수ㆍ중앙일보 객원기자 필진

[송의호의 온고지신 우리문화] 은퇴하면 많은 일이 기다리고 있다. 그중에는 문중 일도 있다. 회갑을 지나면 가장을 넘어 누구나 한 집안의 어른이자 문중을 이끄는 역할을 준다. 바쁜 현직에 매이느라 한동안 밀쳐 둔 우리 것, 우리 문화에 대한 관심을 가져 보려고 한다. 우리의 근본부터 전통문화, 관혼상제 등에 담긴 아름다운 정신, 잘못 알고 있는 상식 등을 그때그때 사례별로 정리할 예정이다. 또 영국의 신사, 일본의 사무라이에 견줄 만한 우리 문화의 정수인 선비의 정신세계와 그들의 삶을 한 사람씩 들여다보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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