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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름달이 된 반달 모양 호보백

중앙선데이 2017.11.26 03:07 559호 31면 지면보기
홍은택 칼럼
“호보백 같은데요.” 

시장용 비닐봉지처럼 쓰기 편해
이것저것 던져 넣고 다니다 보니
정작 필요한 건 찾기 어려울 지경
욕심부릴수록 번잡해지는 삶 같아

패션스쿨의 원장님이 내 가방을 이리저리 둘러보더니 유권해석을 내렸다. 커머스에 입문한 지 2년. 가까이서 많은 가방을 봤지만 호보백이라는 이름은 처음 들었다. 동석했던 패션스쿨 교수님들 네 분이서 스마트폰으로 호보백의 다양한 이미지를 찾아줬다. “이렇게 반달 모양으로 윗부분이 늘어진 가방을 호보백이라고 해요.”
 
갑자기 명품백 비스름한 것이라도 들고 다니는 기분이 들었다. 어차피 루이비통이든 에르메스든 짝퉁을 감쪽같이 들고 다니기도 하지 않는가. 상대방이 봐주기 나름이다. 호보백의 족보가 궁금해졌다. 호보(hobo)는 미국에 갓 도착한 이민자나 노숙자와 같은 낭인을 일컫는 말인데 우리나라로 치면 괴나리봇짐 같은 것을 어깨에 걸친 막대기 끝에 매달아 들고 다녔다. 막대기에 축 늘어지니 자연히 반달 모양을 이룬 것인데 가방회사들이 비슷한 모양의 핸드백을 만들면서 시크하게 호보백이라고 명명했다.(호보들은 자신의 백을 호보백이라고 부르지는 않았을 것이다.) 1961년 재클린 케네디가 끈이 길지 않은 구찌 호보백을 옆구리에 끼듯이 어깨에 걸친 모습이 카메라에 잡혔고 마케팅에 활용되면서 호보백은 잇백으로 올라섰다. 이런 형태의 호보백을 재키백이라고 부르는데 에르메스의 켈리백이나 버킨백도 모두 유명인사들의 지명도를 활용한 가방들이다. ‘명품백’이라기보다는 명사들의 백이다.
 
사실 명품백은 없던 말이었다. 1990년대 중반 백화점에서 아르마니 양복과 샤넬 백과 같은 사치품을 수입해다가 명품 기획전이라는 이름으로 판매하면서 국보급 문화재를 일컫던 명품이 상품이 돼버렸다. 그러면서 사치품을 구입한다는 심리적 부담들을 다 함께 덜었다.
 
내 가방은 명품백도, 호보백도 아니다. 자투리 원단을 재활용해 만든 업사이클링 가방이다. 제작 과정도 단순하다. 두 겹의 소가죽 원단을 가로 31㎝, 세로 56㎝로 똑같이 잘라 4면의 모서리를 서로 박음질해서 붙이고 윗변을 삽 모양으로 오려내 손잡이를 만들었다. 오려낸 삽 모양의 원단은 윗부분에 지퍼를 달아 라운드 파우치로도 만들었다. 자투리라도 제작과정에서 한 조각 버리는 부분이 없도록 건축가가 설계한 가방이다. 이 건축가는 이 가방의 유형을 수퍼 백이라고 명명했다.
 
가방 만드는 사람들은 새 장르를 개척하고 싶은 욕심에 빠지는 것 같다. 핸드백만 해도 자고 나면 새로운 장르가 출현한다. 가장 보편적인 손잡이 있는 가방인 토트백에서 시작해 일단 모양으로 보면 네모난 스퀘어백, 학생들의 책가방을 본뜬 사첼백, 양동이 모양의 버킷백, 반달 모양의 호보백, 장바구니 모양의 쇼퍼백이 있다. 끈과 손잡이로 구분해 보면 끈이나 손잡이가 없는 직사각형의 클러치, 역시 손잡이가 없지만 더 다양한 형태가 있는 파우치, 어깨끈이 있는 숄더백, 어깨를 가로질러 멜 수 있는 크로스백, 허리에 매는 힙색. 여기에 끈을 탈부착할 수 있는 투웨이백, 다섯 가지로 용도를 바꿀 수 있는 5웨이백이 있다. 이 모든 게 내 눈에는 한 가지로 보인다. 핸드백. 수퍼 백은 위의 분류에 들어가지 않는 신조어인데 수퍼마켓에서 나눠주는 비닐봉지 모양이어서 그렇게 이름을 지었다나.
 
내가 이 가방을 들고 다니자 주위 사람들의 반응이 홍해처럼 짝 갈라졌다. 남자는 무반응이었고 여자들은 이구동성으로 “남의 가방을 대신 들어주고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여자 가방일 뿐 아니라 나이에 어울리지도 않아서 징글맞다는 것이다. 어쩌다 간혹 “어디서 났느냐”고 묻는 독특한 사람도 있다. 30만원 하는 자기 털 파우치랑 바꾸자고 한다. (이거 5만9000원짜리인데 ㅎㅎㅎ)
 
원래 나는 가방 들고 다니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무거운 책가방이 가방에 대한 원 관념을 버려놓았다. 가방은 내용물에다 무게만 더한 존재였다. 하지만 견물생심이라고 다양한 가방들을 취급하다 보니 어느새 손으로 들고 다니는 가방만 몇 개다. 처음에는 배우 하정우씨의 그림이 그려져 있는 노트북 파우치를 주문했는데 누가 달라고 해서 주고 난 뒤에는 가죽 클러치를 들고 다녔다. 그때도 주위의 반응은 좋지 않았다. 일수 찍는 사람 같아 보인다나. 이것도 누가 좋아 보인다고 해서 주고 난 뒤에는 두 손에 자유가 찾아왔다.
 
근데 어찌 된 일인지 옷 주머니로는 물건들을 수습할 수 없게 됐다. 잠깐 청바지를 업사이클링한 파우치를 거쳐서 지금 들고 다니는 호보백을 보는 순간 설레는 기분이었다. 여자들의 심정, 알 것 같다. 넉넉한 수납공간에다 무엇보다 지퍼가 없어서 쉽게 물건을 넣고 뺄 수가 있다. 비닐봉지에 물건을 담듯 쉽게 넣다 보니 이것저것 다 들어간다. 그러다 보니 하나둘씩 늘어난다. 작은 노트에다 볼펜, 차 열쇠, 출입증, 명함집, 지갑, 핸드폰 충전케이블, 이어폰, 그리고 말하기가 어려운 두 가지 물건, 공인인증서가 담긴 USB, 금융거래를 위한 OTP 카드, 스킨로션, 선크림, 장갑에다 공간이 넓으니 책도 한 권, 간절기에 쉽게 입고 벗을 수 있는 조끼까지….
 
가방은 이제 반달이 아니라 보름달이 됐고 사람들은 이 가방을 장바구니 가방이라고 본다. 무거워졌고 물건을 찾기 어렵다. 입구를 열어 머리를 처박고 뒤져야 한다. 가방이 클수록 더 많이 담게 되고, 더 많이 담을수록 가방은 짐이 돼버린다. 여기서 뭔가 인생의 심오한 교훈을 깨우칠 법도 하지 않은가. 욕심부릴수록 삶은 번잡해지고 원하는 것은 갈수록 찾기 어려워진다 이런 거? 큰 집에 살수록 더 많은 것을 채워 넣게 되고, 더 많은 것들이 있을수록 관리만 어려워진다.
 
알겠는데, 어느새 나는 신상인 가죽 브리프 케이스에 입맛을 다시고 있다. 차라리 그냥 이 호보백에서 멈추는 것이 그나마 욕심을 자제할 수 있는 길인 것 같다. 어차피 내 것처럼 보이지 않는다니 들고 다녀도 무방하지 않은가.
 
 
홍은택  카카오메이커스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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