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난해시, 어떻게 즐길까

중앙선데이 2017.11.26 02:34 559호 29면 지면보기
공감共感
“선생님, 요즘 시들은 왜 이렇게 어려운가요? 못 읽겠어요.”

정답 꿰맞추려면 실패하기 쉬워
차라리 악보로 생각해서
시를 음표 삼아 자신을 변주해야

 
여기저기에서 독자들의 비명이 들린다. 도서관에서, 학교에서, 기업에서, 이해 불능을 호소하는 소리가 넘쳐 난다. 난해함이 문학성을 증명한다고 생각하는 걸까. 언어가 배배 꼬였다. 어찌 보면 아무 의미 없는 말을 되는 대로 쏟아 부은 것만 같다. 어떨 때는 짜증이 치밀어 오를 지경이다. 도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걸까, 하는 생각마저 든다. 시인들이 미친 걸까? 시는 왜 자꾸만 어려운 길로 가는 걸까?
 
“시, 일부러 뜯어본 주소 불명의 아름다운 편지/ 너는 그곳에 살지 않는다”
 
『일곱 개의 단어로 된 사전』에서 진은영은 말한다. 우리는 시가 어디로부터 오는지 알지 못한다. 주소 불명의 상태로 시는 갑자기 눈앞에 출현한다. 부사 ‘일부러’에 주목해 보자. 주소 불명이니까 우리는 이 편지가 누구한테 온 것인지 도무지 알 수 없다. 밤사이 내린 눈이 나한테 쏟아진 게 아니고, 한 줄기 청량한 바람이 나에게 불어온 게 아니듯, 편지 역시 나를 스쳐 가는 무수한 우발적 사건 중 하나에 지나지 않는다. 시 쓰는 일은 우연한 편지가 나한테 온 것이라고 믿고, 호기심에 가득 차, 용기를 내면서 ‘일부러’ 봉투를 뜯는 일과 같다.
 
시인은 왜 이런 수고를 하는 걸까. 이 행위가 아름답기 때문이다. 시가 존재함으로써 세상의 흐름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러시아의 미학자 쉬클롭스키는 ‘아름다움’을 ‘낯설게 하는’으로 풀이한다. 우리가 아름답다고 느끼는 것은, 시시하고 지루하고 재미없는 타성의 세계가 혁신되는 감각이다. 정해진 대로 흘러가는 일상에 돌연한 활력을 불어넣어, 싱싱하고 재미있고 모험 찬 세계를 여는 일이다. 시인은 어느 날 마주친 주소 불명의 편지를 개봉함으로써, 편지가 눈에 띌 때까지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던 어떤 세계를 발명해 버린다.
 
하지만 이 편지는 발송할 수 없다. 애초에 주소 불명이라 너에게 부칠 수 없기 때문이다. 네가 이미 그곳에 있지 않기에, 이 편지는 소통의 용도를 잃고 하나의 아름다운 사물로만 존재하게 된다. 언어로 이루어져 있지만, 너에게 가 닿기를 꿈꾸지 않는, ‘부재’로만 존재한다. 행운의 편지가 주소 없이 세상을 떠돌듯 시는 일상으로 귀환하기를 거부한 채, 우연한 누군가가 ‘일부러’ 열어볼 때까지 무한한 도망을 실행한다. 제자리에 있다 해도 무슨 상관이겠는가. 너는 벌써 거기에 없고, 뜯을 때마다 새로운 ‘너’가 무한정 일어설 텐데.
 
일상의 언어처럼 전달을 기획하지 않고, 처음부터 언어로 만든 아름다운 항아리로 존재하려 하기에, 좋은 시일수록 다가가기 까다롭다. 전달이란 무엇인가. 일찍이 미셸 푸코가 밝혔듯이, 말과 사물의 질서는 그 자체로 순수하지 않고, 권력의 작용을 통해 생성된 것이다. 무언가 전달된다는 것은 그 자체로 권력을 운반하는 일이고, 기성의 질서에 또다시 포획되는 일이다. 낡아빠진 위계에 재생산하지 않으려 하는 도주의 언어로 존재함으로써 시는 체제에 저항한다.
 
오늘날 우리는 일상에 대해서는 모든 것을 말하지만, 진실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는 시대를 살아간다. 페이스북이나 카카오톡을 보라. 현대의 성소다. 우리는 먹고 입고 자고, 일하고 쉬고 만나고 헤어지는 모든 일을 거리낌 없이 고백한다. 말들이 넘쳐 나 홍수를 이루면서, 모든 것을 말할 수 있는 듯하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가슴에 떠오르는 것은 무엇이든 말할 수 있고, 마음이 욕망하는 것은 무엇이든 표현할 수 있는 시대이기에, 이 편리한 소통의 구조를 타고 권력의 재생산 작용 역시 어느 때보다 활발하다. 소셜미디어의 소통이 활발해질수록, 자본의 신이 배후에서 희롱하는 ‘호모데우스’의 세상도 가까워진다. 언어를 소통이 아니라 사물을 만드는 데 사용함으로써 사물의 질서를 교란하고, 진실을 말하려는 용기를 품고 세계의 질서를 다시 짜려 하는 시적인 반항이 더욱더 소중한 것은 이 때문이다.
 
난해시를 어떻게 하면 즐길 수 있을까. 이 시들은 소통의 방식으로 읽으면, 즉 한 줄 한 줄을 따져서 학생 때처럼 그럴듯한 정답을 조직하려 하면 실패하기 쉽다. 차라리 악보로 생각하는 쪽이 낫다. 연주자들이 똑같은 악보로 매번 다른 음악을 창조하듯, 시의 언어를 음표 삼아 우리 자신을 변주함으로써 인생 자체를 새롭게 창조하는 것이다. 시를 일종의 도구 상자로, 자기 언어의 박물관을 창조하고 확장하는 수집품으로 써 보라. 본래 존재한 적도 없는 시인의 의도에 관습적으로 복종하지 말고, 스스로를 고양해 시의 창조자가 되는 것이다. 멋진 일이 아닌가.
 
 
장은수
편집문화실험실 대표

구독신청

공유하기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