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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웨이 “나는 전쟁에 진 사람이지 죄인이 아니다”

중앙선데이 2017.11.26 02:28 559호 28면 지면보기
사진과 함께하는 김명호의 중국 근현대 <556>
한국전 참전군 부사령관을 역임한 천껑(앞줄 왼쪽 둘째), 수리부 부장 장츠중(앞줄 오른쪽 둘째) 등 옛 황푸군관학교 동료들과 함께 전범관리소에 수용 중이거나 풀려난 옛 제자들을 베이징으로 초청한 총리 저우언라이(앞줄 왼쪽 첫째). 둘째줄 왼쪽 둘째가 황웨이. 1963년 봄, 베이징.

한국전 참전군 부사령관을 역임한 천껑(앞줄 왼쪽 둘째), 수리부 부장 장츠중(앞줄 오른쪽 둘째) 등 옛 황푸군관학교 동료들과 함께 전범관리소에 수용 중이거나 풀려난 옛 제자들을 베이징으로 초청한 총리 저우언라이(앞줄 왼쪽 첫째). 둘째줄 왼쪽 둘째가 황웨이. 1963년 봄, 베이징.

군대도 사람 사는 사회다 보니 어쩔 수 없다. 전공(戰功)도 중요하지만, 빨리 진급하고 좋은 보직 받으려면 줄을 잘 서야 한다. 황웨이(黃維·황유)도 어쩌다 보니 줄을 잘 섰다. 큰 전투 지휘한 적이 없어도 승승장구했다. 국민당의 운명이 걸린 ‘화이하이 전역(淮海戰役)’에서 패하는 바람에 비극적인 군인의 전형이 됐다.

국공내전 초기 공산당 포로 돼
동료 전범 중공에 호의 보일 때
“내 뼈를 갈아 죽여도 … ”
타고난 무인기질 마음껏 발휘
생포 27년 만인 1975년에 석방

 
국민당 군은 파벌이 많았다. 훗날 국민당 부총재까지 역임한 천청(陳誠·진성)은 11(十一)사단과 18(十八)군 출신이었다. 두 부대를 거친 장교나 장군들은 천청의 직계였다. 이들을 十一과 十八을 합친 토목계(土木系)라 불렀다. 황웨이는 두 부대에서 연대장과 사단장, 군단장을 역임한 토목계였다. 게다가 황푸군관학교 1기였다. 장제스(蔣介石·장개석)의 1기생 챙김은 유별났다. 다들 천자(天子)의 문하생이라 불렀다.
 
천청은 아끼는 부하들을 위험한 곳에 보내지 않았다. 항일전쟁 시절 황웨이는 이렇다 할 전과가 없었다. 전쟁 승리 후에도 훈련과 교육 전담하는 참모 노릇만 했다. 얌체 소리 들어도 한 귀로 흘렸다.
 
일본이 중국에서 떠나자 국·공내전이 발발했다. 1947년 말부터 국민당이 밀리기 시작했다. 이듬해 가을, 대규모 전쟁 분위기가 무르익었다. 장제스가 난징에서 군사회의를 소집했다. 부대를 재배치하고 대형 병단(兵團) 12개를 신설해 결전에 대비했다.
 
중공은 화동야전군과 중원야전군이 연합작전을 준비했다. 덩샤오핑(鄧小平·등소평), 류보청(劉伯承·유백승), 천이(陳毅·진의), 이센넨(李先念·이선념), 수위(粟裕·속유) 등 훗날 신중국의 최고 지도부가 총출동했다.
 
장제스는 지휘관 선정에 애를 먹었다. 각 계파가 서로 물고 뜯었다. 12병단 사령관에 후렌(胡璉·호련. 1950년대 말 진먼다오(金門島) 방어전을 지휘했다)을 임명했다. 전쟁을 지휘할 총사령관 내정자는 천청과 불화가 심했다. 이름만 들어도 눈살을 찌푸릴 정도였다. 토목계인 후렌도 좋아할 리가 없었다. 극구 반대했다.
 
장제스는 참모차장을 상하이에서 몸조리 중인 천청에게 파견했다. 천청은 길게 생각하지 않았다. 참모차장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황웨이를 추천했다. 이번에는 국방부장이 반대의견을 냈다. 난감해진 장제스는 참모총장에게 의견을 물었다. 총장은 장제스의 심중을 잘 읽었다. “충성심이 높이 살 만하다”며 황웨이를 지지했다.
 
당시 황웨이는 군관학교 교장이었다. 병단 사령관은 생소한 자리였다. 장제스에게 사정을 설명했다. “부대 떠난 지 오랩니다. 전투 병력 지휘에 어려움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장제스가 발끈했다. “지금 가장 시급한 일은 교육이 아니라 전쟁이다. 공산당 섬멸 외에는 신경 쓸 일이 없다. 개인 사정 고려할 때가 아니다.” 장제스는 뭔가 미덥지 않았다. 토목계 맹장 후렌을 부사령관으로 딸려 보냈다.
 
황웨이는 부하들에게 믿음을 주지 못했다. 부임 첫날, 예하 지휘관들에게 엉뚱한 훈화를 했다. “나는 임시로 사령관직을 맡았다. 반년 후에는 후렌 부사령관에게 직을 넘길 생각이다.” 훈화 시간도 10분이 채 안 됐다. 일선 지휘관들의 반응이 좋을 리 없었다. 군사(軍史) 전문가 한 사람이 원인을 분석했다. “지휘관들은 황웨이가 부임하기 전부터 불만이 많았다. 12병단에는 11사단과 18군 노병들이 많았다. 황웨이가 얼마나 엄하고 인색한지를 잘 알았다. 대군을 인솔한 적이 없고 공산군과의 작전경험도 부족했다. 류보청이나 덩샤오핑의 적수가 아니라고 확신했다. 류보청의 포로 될 날이 임박했다며 불안해 했다.”
 
부하들과 함께 포로가 된 황웨이. 1948년 12월 15일, 안후이(安徽)성 난핑(南坪). [사진 김명호 제공]

부하들과 함께 포로가 된 황웨이. 1948년 12월 15일, 안후이(安徽)성 난핑(南坪). [사진 김명호 제공]

불안은 현실로 나타났다. 황웨이는 적의 정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담력도 딸렸다. 공격기회를 여러 번 놓쳤다. 전쟁 시작 39일 만인 1948년 12월 15일, 포로가 됐다. 후렌은 도망치는 바람에 포로신세를 면했다.
 
65일간 계속된 화이하이 전역에서 국민당은 참패했다. 12명의 병단 사령관 중 한 명이 자살하고 두 명은 전사했다. 사병으로 위장해 탈출에 성공한 지휘관도 있었지만, 전역을 총 지휘한 두위밍(杜聿明·두율명. 노벨 물리학상 수상자 량전닝의 장인)도 포로신세를 면치 못했다.
 
황웨이는 전범관리소에 수용됐다. 장제스의 총애를 받던 전범들이 중공에 호의를 보이기 시작했다. 자본론과 마오쩌둥의 저서를 끼고 다녔다. 황웨이는 전장에서는 무능했지만, 전범생활은 달랐다. 타고난 무인기질을 맘껏 발휘했다. “나는 전쟁에 진 사람이지 죄인이 아니다. 내 뼈를 갈아 죽여도 애석하지 않다.”
 
신중국 군인들이 경전으로 여기던 소련 소설이 있었다. 황웨이도 부인이 보내 준 돈으로 한 권 구입했다. 읽고 나서 화장실로 들고 갔다. 쓸모라곤 한 군데밖에 없다며 위생지 함에 던져 버렸다. 비판이 쏟아졌다.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주은래)가 “원래 그런 사람이니 모르는 체하라”고 하지 않았으면, 무슨 일이 벌어졌을지 모를 대형 사건이었다.
 
중공은 전범들을 통일전선대상으로 분류했다. 성공하면 일찍 풀어 줬다. 황웨이는 예외였다. 1975년 3월, 맨 마지막으로 석방했다. 생포된 지 27년 만이었다.
 
 
김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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