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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안 보여도 느낄 수 있는 영화, '빛나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 인터뷰

중앙일보 2017.11.24 17:25
‘빛나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 / 사진=라희찬(STUDIO 706)

‘빛나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 / 사진=라희찬(STUDIO 706)

 [매거진M] ‘빛나는’(원제 光, 11월 23일 개봉)은 가와세 나오미(48) 감독이 첫 장편 극영화 ‘수자쿠’로 1997년 역대 칸국제영화제 최연소 황금카메라상을 받은 지 꼭 20년 만에 선보이는 영화다. 시각장애인을 위한 영화 음성 해설 제작 과정을 전면에 내세운, 어쩌면 첫 영화다. 눈이 보이지 않는 이의 가슴속에 영화라는 하나의 세계를 훼손 없이 옮기려는 이 지난한 고군분투에서 빛나는 건 바로 “영화에 대한 순수한 사랑”. 지난 10월 부산국제영화제에서 가와세 감독이 들려준 ‘빛나는’의 주제다.
 

'빛나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


 
━전작 ‘앙:단팥 인생 이야기’(2015, 이하 ‘앙’)의 배리어프리 버전(시·청각장애인을 위한 자막이나 화면 해설이 포함된 영화)을 접하면서 이번 영화에 착안했다고요. “영화감독으로 데뷔한 지 20년이 됐어요. ‘거장’이라 불리게 된 지금, 어떤 영화를 만들어야 할까, 고민하던 차에 일본에서 ‘앙’배리어프리 버전이 제작됐어요. 음성 해설을 검토해본 건 그때가 처음인데, 화면 해설의 깊이에 감탄했죠. 어쩌면 음성 해설 작가들이 감독인 나보다 더 영화를 잘 이해하고 있는 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요. 눈으로 영화를 볼 수 없는 사람에게 음성 해설을 통해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 영화에 대한 사랑은 그런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어요. 이 이야기를 영화로 꼭 다루고 싶었어요.”
 
━영화는 작가인 미사코(미사키 아야메)가 나카모리(나가세 마사토시)를 비롯한 시각장애인들의 감수를 받으며 어느 영화의 음성 해설을 고쳐 나가는 과정을 좇습니다. 더 간결하고 정확한 묘사를 위해 애쓰는 모습들이 시나리오를 쓰는 과정과도 비슷하다고 생각됐어요. 
“맞아요. 영화도 ‘말’이 너무 많으면 오히려 관객의 상상을 방해하죠. 그래서 저도 시나리오를 퇴고하며 대사를 줄여나가는데, 또 지나치게 줄이면 대체 무슨 이야기인지 알 수 없게 돼버리죠. 그 밸런스를 맞추는 게 쉽지 않아요. 관객이 이 정도는 상상해서 알아주지 않을까. 만드는 사람과 보는 사람 간의 신뢰가 중요해요.”
 
'빛나는'

'빛나는'

━이번 영화를 위해 시각장애인의 자문도 받았나요. 
“영화 출연자 중 실제 시각장애인이 있는데 그분이 한 말을 그대로 집어넣은 대사가 있어요. 영화에 대한 미사코 개인의 해석이 지나치게 가미된 화면 해설을 듣고 그는 이렇게 말하죠. ‘우리는 영화를 볼 때 그 세계에 빨려 들어갑니다. 나도 모르게 어느새 그 안에 들어가 그 광대한 세계를 경험하는 거예요. 그 세계를 ‘말’로 작게 만들지 말아주세요.’ 시각장애인에게 영화를 보는 일이란, 눈 대신 귀로 잘 듣고 느낀 ‘세계’를 상상을 통해 더 풍부하고 커져가게 만드는 기쁨과 같다는 걸 그 얘기로 새삼 절감했죠.”
 
━시각장애인의 집에서도 영감을 얻었다고요. 
“직접 댁을 찾아가 보니, 굉장히 정돈이 잘돼있고 심플했어요. 어질러져 있으면 어디가 어딘지 모르게 되니까요. 슬픈 광경도 봤어요. 더는 필요 없어진 시계가 전부 멈춰있는. 실제로 시각장애인의 절반 이상이 눈이 보이다가 시력을 잃은 분들이에요. 여자들은 비교적 현실을 빨리 받아들이고 새로운 인생을 찾아가지만, 남자들은 세상에서 나란 존재가 이제 필요 없어졌다는 생각에 굉장히 큰 타격을 받는다고 하더군요. 이번 영화의 주인공 나카모리처럼요. 그는 재능 있는 포토그래퍼지만 점점 시력을 잃으면서 절망하죠. ‘앙’에 이어 함께한 배우 나가세 마사토시는 그의 심정에 다가가기 위해 촬영 내내 고글을 끼고 생활했어요.”
 
'빛나는'

'빛나는'

빛이 없다면, 색과 이미지도 없을 거예요. 영화를 만드는 것 또한 불가능하죠. 그러니, 빛은 곧 영화라 말할 수 있지요. 영화를 알고, 사랑하게 되면서 그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게 됐어요. 만약 빛을 느낄 수 없는 시각장애인이 영화를 ‘볼 수’ 있다면, 그 이야기는 영화의 마법을 알고 있는 전 세계 모든 이들을 매료시키지 않을까요? 이것이 ‘빛나는’의 시작이었죠. -가와세 나오미

 
 
━미사코가 음성 해설 작업을 하는 극 중 영화 장면들이 나카모리의 심정과 묘하게 겹졌어요. 
“극 중 영화 주인공 주조(후지 타츠야)가 나카모리의 분신처럼 느껴지길 바랐어요. 그는 나카모리처럼 죽음보다 더한 고통을 겪고 있죠. ‘우리의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만큼 아름다운 건 없어’라는 주조의 탄식을 들으며, 나카모리는 쓰라린 표정을 지어요. 일본인들은 벚꽃을 좋아하는데, 피는 시기가 정말 짧아요. 순식간에 사라지기에 소중히 여기고 아름답다고 생각하게 되는 거겠죠. 반면 영원한 것은 당연하다고 여기고 간과하기 쉬워요. 사실 영원한 것은 없는데도 말이죠. 사라지고 나서야 그 소중함을 깨닫게 되죠.”
 
━나카모리가 놀이터에서 아이들의 사진을 찍으려고 애쓰거나, 술을 먹고 거리에서 비틀댈 때 주변 말소리와 소음이 그의 흐릿한 시야를 뚫고 들어오듯 선명하게 느껴졌어요. 
“그 순간 그가 느꼈을 감각을 그대로 표현한 것이죠. 프랑스 세자르상 수상 사운드디자이너 올리비에 고이나르드의 아이디어예요.”
 
━미사코 캐릭터에 자전적인 가족사를 반영했다고요. 
“미사코에게 우리 할머니 옷을 입혔어요. 그가 아버지를 잃은 것도 나랑 같죠. 하지만 상실의 경험이 우리를 성장시킨다는 건, 내 개인사를 넘어 모든 예술가가 공감해온 이야기예요.”
 
━서로 다른 입장의 타인들이 진심 어린 이해에 이르는 과정을 남녀의 로맨스로 풀어낸 이유는요. 
“연애는 완전한 타인이 점점 가까워지면서 연인이 되는 거잖아요. 절대 섞일 것 같지 않던 사람들이 가까워지는 과정을 그리고 싶었어요. 모두가 각자 자기 입장만 얘기하려 들면 싸움은 영원히 끝나지 않아요. 하지만, 상대에게 귀를 기울이는 순간 이해는 시작되죠. 한 사람, 한 사람이 사랑하듯 타인을 이해해 나가다 보면 언젠가는 전쟁도 사라질 수 있을 거라고 믿어요.”
 
'빛나는'

'빛나는'

━지금껏 영화에서 주로 상처 속에 치유 받는 이들의 내면을 다뤄왔어요. 
“나도 살면서 상처를 많이 받았어요.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랐죠. 가족이란 뭘까. 그 질문을 계속 붙잡고 살아왔어요(가와세 감독은 세 살 때 이혼한 부모 대신 외조부모에게 입양돼 일본 나라 현에서 자랐다. 아버지를 다시 만난 건 스물두 살 때 그가 카메라를 들고 직접 부모의 흔적을 쫓기 시작하면서다. 당시 여정을 담은 다큐멘터리 ‘따뜻한 포옹’(1992)이 주목받으면서 이후로도 그는 사적인 고백을 담은 영화를 만들어왔다). 나에게 영화는 인생의 결핍을 채우고 상처를 덮어나가는 것이었죠. 보는 분들도 조금이라도 희망을 찾기를 바라면서 영화를 만들어왔어요.”
 
━극 중 영화감독이, 자신이 상실감을 표현한 엔딩을 미사코가 희망적으로 해석하자 “그 또한 기쁘다”며 손을 잡아주던 장면이 기억나네요. 
“감독이 명확하게 이거다, 의미를 설명하기보다 관객이 느껴주시는 게 맞다고 말하고 싶었어요. 그게 희망이라면 더할 나위가 없고요.”
 
━깜짝 음성 해설에 나선 ‘앙’의 노장 배우 키키 키린의 인자한 목소리 덕분에 영화 마지막 장면이 더 뭉클했어요. 
“처음부터 키키 키린으로 정했어요. 다른 배우들한테는 다 비밀로 했죠. 그 장면 촬영 당일 나가세 마사토시가 그의 목소리를 듣더니 너무 자연스럽게 눈물을 흘렸어요. ‘앙’을 함께 찍었을 때의 기억이 떠올랐던 것 같아요.”
 
━‘빛나는’은 제목처럼 빛이 강렬한 영화예요. 
“자연광을 최대한 담으려 했어요. 일본의 가을은 화창한 날도 햇빛 비치는 시간이 매우 짧기 때문에 쉽지는 않았죠. 밤 장면에선 조명을 최소화하고 배우의 얼굴에 직접 조명을 비추지 않는 방식으로 영화 전체에서 빛이 자연스레 균형을 이루도록 설계했어요. 석양이 마사코와 나카모리를 따뜻하게 감싸 안는 장면은 운 좋게도 단 한 번의 촬영으로 탄생했죠.”
 
'빛나는'

'빛나는'

‘빛나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 / 영화사 제공

‘빛나는’ 가와세 나오미 감독 / 영화사 제공

━전작들과 마찬가지로 고향 나라 현에서 촬영했어요. 여전히 고향에서 새로운 영감을 얻고 있나요. 
“자신이 발 딛고 있는 곳을 탐구하고 파 내려가는 것이 작가라고 생각해요. 젊을 때는 나라 같은 시골에서 무슨 영화를 만드냐며 도쿄·프랑스 같은 바깥으로 자꾸 나가려고 했는데 지금은 내가 뿌리 내린 이곳, 나라가 ‘진정한 나(本物)’에게 연결되는 힘을 주는 것 같아요. 1300년 전부터 사람이 살아온,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고장이잖아요. 매 작품 준비할 때마다 미처 몰랐던 풍경을 새록새록 발견하고 있어요.”
 
━9월부터 차기작 ‘비전’을 촬영하고 있다고요. 줄리엣 비노쉬가 997년마다 나타나는 미스터리한 풀을 쫓는 저널리스트를 연기한다고 들었어요. 
“나라의 깊은 산속에서 ‘익사이팅’한 나날을 보내고 있어요(웃음). 줄리엣 비노쉬는 말할 것도 없이 대단한 배우여서 하루하루 기쁘게 촬영하고 있습니다. 지난 5월 칸국제영화제에서 또 다른 여성 프로듀서와 셋이서 동 세대 여성끼리 뭔가 할 수 있지 않을까, 의기투합하며 시작된 프로젝트에요. 나가세 마사토시가 산지기로 출연할 예정이에요.”
 
━마지막으로 당신이 영원히 눈에 새기고 싶은 인생의 라스트신을 말한다면요. 
“역시 소중한 사람 아닐까요. 가족이라든지.”
 
 
부산=나원정 기자 na.wonjeong@joongang.co.kr 사진=라희찬(STUDIO 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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