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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 테러지원국 재지정, '평창 구상' 복병으로

중앙일보 2017.11.21 17:20
미국이 북한을 9년 만에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한 가운데 21일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철새가 북한 초소 위를 날고 있다. [연합뉴스]

미국이 북한을 9년 만에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한 가운데 21일 경기도 파주시 접경지역에서 철새가 북한 초소 위를 날고 있다. [연합뉴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백악관 각료회의에서 북한을 테러지원국으로 재지정한다고 밝힌 것은 현지시간으로 20일 오전 11시50분쯤(한국 시간 21일 오전 1시50분쯤)이었다. “이번 미국의 조치는 강력한 제재·압박을 통해 북한을 비핵화의 길로 이끌어낸다는 국제사회의 공동 노력의 일환으로 보며, 북핵 문제의 평화적 해결에 기여할 것으로 기대한다”는 한국 정부의 반응은 그로부터 약 8시간 뒤인 21일 오전 9시43분 나왔다.  
 
정부는 외교부 대변인 성명이 아니라 외교부가 출입기자단에 문자 메시지를 보내 공지하는 형식을 취했다. 그간 정부는 미국의 독자제재 발표 때마다 ‘평가한다’는 입장을 밝혀 왔지만, 이번에는 환영이나 평가라는 표현은 쓰지 않았다. 이에 대해 정부 당국자는 “문구 그대로 이해해달라”고만 말했다.
 
테러지원국 재지정을 한국이 반길 수 없는 이유가 있다. 2018년 2월 평창 겨울올림픽까지 염두에 둔 정부의 북핵 구상에 부정적 요소로 작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정부는 평창 겨울올림픽을 북핵 문제의 돌파구를 뚫는 데 활용하겠다는 의지가 강하다. 관련 사정에 밝은 소식통은 “북한의 핵·미사일 개발 수준과 미국 주도의 제재·압박 속도 등을 볼 때 내년 초 정도가 중대 기점이 될 수 있다. 이 때 우리가 창의적 역할을 하지 못하면 대화 국면으로의 전환 자체가 어려울 수 있다”고 이른바 ‘평창 구상’의 배경을 설명했다.  
 
문재인 정부가 한·중 관계 개선을 서둔 이유 역시 중국이 이런 과정에서 중재자 역할을 할 수 있는 환경을 만들기 위해서였다. 문정인 대통령 통일·외교·안보 특보도 20일 서울외신기자클럽 간담회에서 “기본적으로 평창 겨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개최하면 북·미 간 대화나 북핵 문제 해결에 긍정적 효과가 있을 수 있다. 복병은 많지만, 문재인 정부가 이를 잘 관리하면 평창 겨울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이끌고 남북관계를 개선하며 새로운 돌파구를 열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북한의 테러지원국 재지정은 복병 중에도 큰 복병이다. 북한이 이에 반발해 고강도 도발을 감행하면, 상당 기간 긴장이 이어질 수밖에 없다.
 
노규덕 외교부 대변인은 21일 정례브리핑에서 "북한 테러지원국 재지정과 평창 동계올림픽은 특별한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연합뉴스]

노규덕 외교부 대변인은 21일 정례브리핑에서 "북한 테러지원국 재지정과 평창 동계올림픽은 특별한 관계가 없다"고 선을 그었다. [연합뉴스]

정부는 일단 동력을 이어가려는 분위기다. 노규덕 외교부 대변인은 21일 정례브리핑에서 테러지원국 문제로 평창에서 북한과 대화를 모색해보겠다는 정부의 구상이 영향을 받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정부는 이번 조치가 북핵 문제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향에 기여할 것을 기대하는 입장”이라며 “그런 차원에서 평창 동계올림픽과는 특별한 관계가 없을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정부가 테러지원국인 북한의 평창 겨울올림픽 참가를 독려하거나, 이를 계기로 북한과 스포츠 분야 이외의 대화를 꾀하려 시도한다면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사회 대북 압박 행렬에서 이탈하는 듯한 인상을 줄 수 있다는 것이 딜레마다. 정부 소식통은 "미국이 가용한 수단은 다 쓰겠다는 것인데, 우리로선 복잡한 입장일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박인휘 이화여대 국제학부 교수는 “미국이 이번 조치를 통해 보내려는 대북 메시지는 확실하다. 압박을 끌어올려 ‘대화를 하더라도 북한이 원하는 구도로는 되지 않는다. 우리가 만든 판에 너희가 들어오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한국 정부가 평창 겨울올림픽을 관계 개선의 계기로 삼기 위해 무리하게 대북 유화 제스처를 취하는 것은 한·미 간 엇박자로 이어질 수 있다.
 
다만 미국도 북한을 테러지원국 명단에 다시 올리면서도 대화와 협상의 여지는 분명히 남겼다. 렉스 틸러슨 미 국무장관은 관련 브리핑에서 “북한은 대화에 나오지 않으면 상황은 더 나빠질 뿐이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북한 주민의 다른 미래를 위해 북한이 나와서 대화하길 바란다”고 말했다.  
 
미국은 또 테러지원국 재지정 사유로 북한에 억류됐다 혼수상태에 빠진 채 돌아와 숨진 미국인 대학생 오토웜비어 사건은 명시했으면서 김정남 암살 사건에 대해서는 ‘해외에서 불법 화학무기를 사용한 암살’이라고만 표현했다. 트럼프 대통령도, 틸러슨 장관도 김정남이라는 이름을 직접 언급하지는 않았다. 외교가 소식통은 “김정은 북한 노동당위원장이 혈육을 살해했다는 공표가 될 수 있어 미국도 신중히 단어 선택을 한 것 같다. 미국의 대북 기조인 ‘최고의 압박과 관여’에서 압박 뿐 아니라 관여의 길을 여전히 열어놓고 있다는 신호이기도 하다”고 전했다.
 
유지혜 기자 wisepen@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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