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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향기] 어느 ‘워라밸’ 낙제생의 반성문

중앙일보 2017.11.21 02:18 종합 32면 지면보기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 밤샘토론 앵커

후배들에게 ‘화석’ 취급 받는 것, 전혀 어렵지 않다. 그네들이 ‘홍상수-김민희 스캔들’을 운운할 때 “사랑 앞에 용감하기로는 왕년의 김지미-나훈아 커플만 하겠느냐”고 한마디 툭 던지면 된다. 회사 생활의 고충을 털어놓기라도 하면 “내가 신참 시절엔 선배들 담배 심부름까지 했다”는 말로 기가 턱 질리게 할 수도 있다. 뭐니뭐니해도 세대 차이를 확 실감케 하는 방법은 요새 기준으론 “이거 실화냐?” 소리가 절로 나올 출산 전후 체험담을 들려주는 거다.
 

너나없이 일중독에 빠진 ‘과로 사회’에 변화의 조짐
근로시간 단축 논란, 더 나은 삶 위한 지혜 모아 풀길

“일하는데 배가 살살 아프기 시작한 거야. 예정일보다 2주 정도 진통이 빨리 온 거지. 부장께 말씀드리니 ‘첫애는 일찍 안 나오니까 하던 일 마치고 퇴근하라’시네. 그래서 일 마무리한 뒤 ‘애 낳고 돌아오겠습니다’ 인사하고 집에 갔잖아. 밤새 진통하다가 이튿날 우리 딸을 낳았고.” 이쯤에서 눈이 동그래진 이들의 입을 쩍 벌어지게 하는 건 다음 대목이다. “그러곤 한 달 반 만에 다시 출근했어. 회사에서 혹시 휴가 다 안 쓰고 나올 수 있는지 묻길래 바로 그런다고 했지.”
 
부디 오해하지 마시기 바란다. 요즘 이런 소리 함부로 지껄이면 자칫 폭력이 될 수 있다는 것 잘 안다. “나처럼 살라”는 게 아니라 “절대 그러지 말라”며 반성의 차원에서 건네는 얘기일 뿐이다. 삼십 년 가까이 저 모양으로 살다가 최근에야 시쳇말로 ‘워라밸’의 중요성을 새삼 깨닫게 됐기 때문이다. 한두 해 전인가 ‘워크 앤 라이프 밸런스(Work & Life Balance)’의 줄인 말이란 워라밸을 처음 접했을 때 솔직히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나름대로 잘 살았다고 자부해 온 내 인생이 송두리째 부정당한 느낌이랄까. 돌아보면 내가 선택한 직업 자체가 ‘일과 삶의 균형’이란 잣대로는 낙제점을 면키 힘드니 애초에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던 셈이다. 거기다 주변에 일중독자들이 차고 넘치다 보니 도저히 나 역시 전염되지 않을 도리가 없었다.
 
문제는 나와 내 동료들만 ‘환자’가 아니라는 점이다. ‘과로 사회’라고 불릴 만큼 너나없이 오래 일하는 나라로 호가 났으니 말이다. 얼마 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가 내놓은 이른바 ‘더 나은 삶 지수(Better Life Index)’를 살펴보니 ‘일과 삶의 균형’을 따지는 항목에서 한국은 38개국 중 35등에 그쳤다. 우리 사회의 열악한 워라밸 성적표가 다시 한번 입증된 거다. 그나마 일중독에서 벗어나려는 이들이 급속도로 늘고 있다는 데서 희망을 찾아야 할까. 최근에 나온 통계청 조사 결과, 가정과 일 중에 “일을 더 중시한다”는 응답이 처음으로 50% 밑으로 떨어진 걸로 나타났다. 불과 2년 새 10%포인트 이상 줄었다니 이만저만한 변화가 아니다.
 
숱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정부가 근로시간 단축에 힘을 싣고 나선 것도 이런 변화의 열망을 읽었기 때문일 게다. 자발적이든, 어쩔 수 없어 그러든 일에 푹 파묻혀 사는 대한민국 직장인들을 강제로라도 좀 쉬게 할 필요가 있다고 보는 거다. 일을 줄이면 돈도 줄어든다는 게 가장 큰 걸림돌일 테니 지금부터라도 덜 쓰면서 더 행복하게 사는 법을 다 같이 고민해야 할 것 같다. 무엇보다 늘 바빠서 얼굴 보기 힘든 가족·친구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늘릴 것을 권하고 싶다. 퇴직 후를 대비해 미리미리 저축해야 하는 건 돈뿐이 아니라서다.
 
경제학자 존 메이너드 케인스는 1930년 ‘우리 손자 세대의 경제적 가능성’이란 글에서 100년 뒤엔 인류 대부분이 주당 15시간만 일하게 될 것이란 장밋빛 예언을 내놨었다. 그 정도만 일해도 물질적 필요가 충족돼 남는 시간과 에너지를 잘 즐기는 쪽에 쓰게 될 거란 얘기였다. 하지만 2030년이 불과 13년 앞으로 다가왔는데도 우린 여전히 과로의 늪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다. 빗나간 예언을 탓하기보다는 그가 꿈꿨던 대로 워라밸이 온전히 실현되는 세상을 만들기 위해 뭐든 할 수 있는 노력을 다해야 하지 않을까. 우리는 몰라도 손자 세대는 더 나은 삶을 살 수 있도록 말이다.
 
신예리 JTBC 보도제작국장·밤샘토론 앵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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