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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해보이는 공예품 속에 이런 혁신이 담겨 있다니

중앙일보 2017.11.21 00:01
2017 로에베 공예상에서 우승한 에른스트 갬펄의 '생명의 나무2'. 이 평범한 작품이 왜 우승작인지 궁금하다면 어떤 소재를 활용해 작품을 만들었는지를 눈여겨봐야 한다. [사진 에른스트 갬펄 홈페이지]

2017 로에베 공예상에서 우승한 에른스트 갬펄의 '생명의 나무2'. 이 평범한 작품이 왜 우승작인지 궁금하다면 어떤 소재를 활용해 작품을 만들었는지를 눈여겨봐야 한다. [사진 에른스트 갬펄 홈페이지]

패션 브랜드가 매장이 아닌 갤러리에서 대중과 만나는 게 낯설지 않은 시대다. 해외뿐 아니라 국내에서도 수십 년 전 아카이브를 공개하며 브랜드의 유산을 자랑하거나, 세계 유수 아티스트와 협업한 작품을 보여주는 전시가 종종 열린다. 그럼에도 스페인 패션 하우스 로에베의 이름을 단 최근 전시는 남다르다. 로에베 문화 재단 이름으로 '로에베 공예상(Loewe Craft Prize)'을 준다. 전세계 현대 공예가를 대상으로 하는데, 우승자에게는 5만 유로(6500만원)을 주고 최종 결선작을 모아 세계 순회전을 연다. 한마디로 패션 브랜드가 '공예의 레드 카펫'을 마련한 셈이다. 무슨 배경이 있을까. 11월 16~30일 도쿄에서 열리는 '2017 로에베 공예상' 전시를 다녀왔다. 도쿄=이도은 기자 dangdol@joongang.co.kr
두드러지지 않은 독창성에 놀라다
로에베 공예상 전시가 열린 도쿄 '21_21 디자인 사이트' 모습. [사진 로에베 문화재단]

로에베 공예상 전시가 열린 도쿄 '21_21 디자인 사이트' 모습. [사진 로에베 문화재단]

마드리드-뉴욕을 거쳐 열린 이번 전시는 도쿄의 대표 쇼핑몰 미드타운과 인근 '21_21 디자인 사이트'에 마련됐다. 건물 외벽이 통유리라 외부에서도 작품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입구엔 우승작이 놓여 있었다. 독일 작가 에른스트 갬펄(Ernst Gamperl)이 만든 '생명의 나무 2(Tree of Life 2)'였다. 폭풍우에 뿌리가 뽑힌 300년 된 참나무를 깎아 형태를 만들고 진흙·돌가루 등과 합쳐 매끈한 용기로 재탄생시킨 작품이다. 전시 도슨트는 "미적 아름다움은 물론이고 쓰러진 나무에 영원한 생명을 불어넣는 사회적 메시지를 담아 최고점을 받았다"고 설명했다. 

럭셔리 패션 브랜드 로에베의 공예 실험
패션이 '공예의 레드카펫' 까는 이유?
"퇴색하는 장인 정신 되살려야"

일본 작가 요시아키 코지로 '구조적 파랑(Structural Blue)'은 유리 가루와 산화동(Cooper Oxide, 구리와 산소의 화합물)을 합치는 새로운 시도를 하며 특별상을 받았다. [사진 로에베 문화재단]

일본 작가 요시아키 코지로 '구조적 파랑(Structural Blue)'은 유리 가루와 산화동(Cooper Oxide, 구리와 산소의 화합물)을 합치는 새로운 시도를 하며 특별상을 받았다. [사진 로에베 문화재단]

나머지 스물다섯 개의 결선작 역시 언뜻 보면 그리 튀지 않지만 소재와 제작 과정을 알고 나면 감탄이 나올 만큼 독창적이었다. 특별상을 받은 일본 작가 요시아키 코지로의 '구조적 파랑(Structural Blue)'은 유리 가루와 산화동(Cooper Oxide, 구리와 산소의 화합물)을 합쳐 구워내는 남다른 시도를 했다. 수차례 실험을 통해 녹은 유리와 가열된 미네랄에서 나온 가스가 파란색의 유리와 자기 중간 정도의 질감을 만들어냈다. 또 다른 특별상 수상작인 멕시코 공예 가족의 작품 '타타 쿠리아타(Tata Curiata)' 역시 남서부 미초간 지역 원주민 사이에서 내려온 전통 수공예 기법을 이용, 밀짚의 꼬임만으로 새와 별 등을 정교하게 표현해 주목받았다. 
멕시코 미초간 지역 원주민들의 전통 수공예로 만든 '타타 쿠리아타'. 세대를 이어 온 장인 정신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사진 로에베 문화재단]

멕시코 미초간 지역 원주민들의 전통 수공예로 만든 '타타 쿠리아타'. 세대를 이어 온 장인 정신이 높은 점수를 받았다. [사진 로에베 문화재단]

한국 작가도 전시장에서 볼 수 있었다. 배세진 작가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2000여 개 점토 조각들에 일련 번호를 붙이고 이를 하나씩 끼워넣는 방식으로 작품을 완성했는데, 오차 없이 이음새가 들어맞는 기왓장을 연상시켰다. 또 파리와 스위스에서 활동 중인 김상우 작가의 '겨울'은 스위스 에멘탈 지역의 눈 덮인 산을 자기로 표현해 동서양의 조합을 꾀했다. 
소재와 형태는 모두 제각각이었지만 관통하는 공통점이 있었다. 바로 혁신이다. 2017년 4월 로에베 문화 재단은 결선작 명단을 발표하며 "소재의 융합, 창조적 아이디어, 기술적 혁신, 그리고 장인의 손맛이 독보적으로 드러난 작품에 높은 점수를 줬다"고 밝힌 그대로다. 
배세진 작가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토기 조각을 하나하나 끼워넣는 방식으로 '시간 기록'을 담았다. [사진 로에베 문화재단]

배세진 작가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토기 조각을 하나하나 끼워넣는 방식으로 '시간 기록'을 담았다. [사진 로에베 문화재단]

스위스 에멘탈 지역의 눈 덮인 산을 자기로 표현한 김상우 작가의 '겨울'. [사진 로에베 문화재단]

스위스 에멘탈 지역의 눈 덮인 산을 자기로 표현한 김상우 작가의 '겨울'. [사진 로에베 문화재단]

남다른 시선으로 공예를 바라보다
옻의 매끈함을 형상화 한 일본 작가 이가와 타케시의 작품. [사진 로에베 문화재단]

옻의 매끈함을 형상화 한 일본 작가 이가와 타케시의 작품. [사진 로에베 문화재단]

이 상은 일반 공모상과는 사뭇 다르다. 75개국 3900여 점이나 응모하다보니 스펙트럼이 정말 넓다. 4월 마드리드에서 열린 결선 출전자 행사에 참석한 배세진 작가는 "작품 수준은 높았지만 알 만한 유명 공예가는 정작 많지 않아 오히려 신선했다"고 말했다. 행사장에서 만난 일본 작가 이가와 타케시 역시 "결선까지 온 게 스스로 부끄럽다"고 겸손을 떨만큼 신진이지만 옻이라는 도료의 특성을 잘 살려 독창성을 인정 받았다. 그렇다고 이 공모전이 대학생이나 갓 졸업한 20~30대가 주를 이루는 신인 등용문은 아니다. 응모자 연령은 33~73세까지 편차가 컸고, 우승자 갬펄 역시 20년 이상 나무를 연구한 쉰 두 살의 기성 공예가였다. 
2017년 4월 마드리드에 모인 결선 진출 작가들. 앞줄 왼쪽 두 사람은 멕시코 오지에 사는 공예가 가족의 일원으로 이 행사엔 부녀가 참여했다. [사진 에른스트 갬펄 홈페이지]

2017년 4월 마드리드에 모인 결선 진출 작가들. 앞줄 왼쪽 두 사람은 멕시코 오지에 사는 공예가 가족의 일원으로 이 행사엔 부녀가 참여했다. [사진 에른스트 갬펄 홈페이지]

로에베 공예상이 이처럼 다양한 배경을 지닌 공예 장인들의 판이 될 수 있었던 건 로에베가 처음부터 그렇게 설계했기 때문이다. 경력이나 수상 여부 등에 제한을 두지 않고 '18세 이상' '5년 이내 만든 작품'으로만 응모 자격을 뒀다. 지역과 나이는 물론 신인이라고, 혹은 거꾸로 너무 유명하다고 차별을 두지 않았다. 특별상을 받은 멕시코의 공예 가족은 인터넷도 연결되지 않는 오지에 살고 있지만 현지 공예 박물관의 추천으로 응모를 했다. 아버지와 딸만 결선 진출자 행사에 참석했는데, 이는 두 사람의 첫 해외 나들이였다. 재단 측은 "팔레스타인·아프리카에서도 응모자가 있다"며 "공예가 모든 인류의 삶에 얼마나 중요한지 알리는 것이 이 상의 진짜 의미"라고 말했다.   
가죽 장인의 DNA 이어 받다
로에베 공예상 주최하는 로에베 문화재단의 쉐이라 로에베 대표. [사진 로에베 문화재단]

로에베 공예상 주최하는 로에베 문화재단의 쉐이라 로에베 대표. [사진 로에베 문화재단]

비영리로 운영하는 로에베 문화 재단은 공예뿐 아니라 회화·사진·영상 등 다양한 예술을 후원하고 있다. 하지만 이처럼 대대적인 글로벌 연례행사를 하는 건 공예 뿐이다. 무슨 이유일까. 도쿄 전시장에서 만난 로에베 가문 5대손이자 로에베 문화재단 대표인 쉐이라 로에베는 이렇게 답했다. 그는 "로에베는 1840년대 독일 장인 엔리케 뢰스베르그 로에베(Enrique Roessberg Loewe)가 스페인으로 이주해 여러 가죽 장인들과 조합을 만들면서 생겨난 브랜드"라면서 "스페인 수공예 기술을 대표하는 브랜드라는 자부심이 바탕이 됐다"고 말했다. "장인 정신이 점점 퇴색해가는 요즘 이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시도가 필요했다"는 말도 덧붙였다. 
좀더 깊숙이 들여다보면 '보이지 않는 손'의 결정적인 역할이 있었다. 바로 로에베의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이다. 그는 2013년 브랜드에 합류한 순간부터 이 상을 구상했고, 재단 측이 이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공예 컬렉터로도 유명한 그는 "공예에서 많은 영감을 얻는 창작자로서 이러한 고마움을 돌려주는 것이 중요하다(패션지 W)"거나 “사람의 손이 빚어내는 가치를 담고 있는 패션 브랜드라야 발전을 이어갈 수 있다(파이낸셜 타임즈)”는 등의 발언으로 공예에 대한 각별한 애정을 내비쳤다. 상이 만들어지자 심사위원으로도 이름을 올렸다. 
16일 열린 리셉션에서 특별상을 받은 일본 작가 요시아키 코지로와 기념 촬영을 하는 로에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 이도은 기자

16일 열린 리셉션에서 특별상을 받은 일본 작가 요시아키 코지로와 기념 촬영을 하는 로에베 크리에이티브 디렉터 조나단 앤더슨. 이도은 기자

도쿄 전시 첫날인 16일 열린 리셉션 파티에 나타난 조나단은 남다른 관심과 호의를 역력히 드러냈다. 행사장에 온 일본 작가 요시아키 코지로, 이가와 타케시 등을 반갑게 맞으며 마치 기자가 인터뷰하듯 작품에 대해 묻고 답을 듣는데 오랜 시간을 들였다. 이들과 몇 번의 기념 촬영에도 흔쾌히 응했다. 그에게 "심사위원이 아닌 컬렉터로서 어떤 작품을 보유하고 싶냐"고 물었더니 "모두 욕심이 나지만 이걸 살 만한 여윳돈이 내게 별로 없다"며 농담 섞인 답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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