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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부 주거대책 발표에 이재민들 "누군 되고 누군 안되나?"

중앙일보 2017.11.20 16:18
20일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남산초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이재민들이 머무르고 있다. 포항=김정석기자

20일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남산초에 마련된 대피소에서 이재민들이 머무르고 있다. 포항=김정석기자

 
"우리 집은 안전하다고 임대주택 지원 안 해준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 집에서 딱 하룻밤만 자보라고 해요!"

주택 파손 심한 이재민들 모인 흥해 남산초 대피소
돌아갈 곳 없는 이들 이재민 주거지원책 초미의 관심
"대성아파트는 되고 한미장관맨션은 안 된다" 등 불만
제한된 임대주택 지원에 원성…"현실 안 맞는 대책"

 
20일 경북 포항시 북구 흥해읍 흥해남산초 체육관 대피소. 200여 명의 이재민이 체육관 바닥에 깔린 매트 위에 앉아 있었다. 집에서 급하게 싸 들고 나온 짐들을 곁에 어지럽게 쌓아둔 채였다. 15일 규모 5.4 지진이 일어난 후 줄곧 바깥에서 지내다 보니 모두 초췌한 모습이었다. 
 
흥해남산초 체육관에 머무르고 있는 이재민들은 대부분 주택이 심하게 파손돼 돌아가지 못하는 이들이다. 지진으로 건물이 4도가량 기운 포항시 북구 흥해읍 대성아파트 주민들도 이곳에서 지내고 있다. 심하게 파괴된 곳으로 꼽히는 대동빌라, 크리스탈원룸, 한미장관맨션 주민들도 있다.
지진으로 기울어져 있는 경북 포항시 대성아파트. 우상조 기자

지진으로 기울어져 있는 경북 포항시 대성아파트. 우상조 기자

 
집안에 심한 균열이 생기고 수도와 전기·가스 등이 끊겨 집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들인 만큼 이재민 주거지원 대책에 관심이 많았다. 이재민들은 근심 어린 표정으로 정부가 지원한다는 한국토지주택공사(LH) 임대주택이나 지역 재개발 여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 이재민은 정부의 주거지원대책이 턱없이 미흡하다고 입을 모았다. LH 임대주택 지원 가구수가 160가구에 그치는 데다 지원 기간도 6개월에 불과해 현실과 맞지 않는다는 지적이다. 또 한 쪽에서는 임대주택 지원마저도 받지 못하게 됐다며 울분을 터뜨렸다.
 
행정안전부와 국토교통부는 19일 정부서울청사에서 합동 브리핑을 갖고 "지진 피해자들에 LH 임대주택 160가구를 우선 지원한다"고 밝혔다. 임대주택은 임대보증금을 받지 않고 임대료 50%를 감면한다. 나머지 50%는 경북도와 포항시가 지원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사실상 무료로 임대주택을 지원하는 방식이다.
 
정부가 이재민의 임시 거처로 지원할 계획인 임대주택은 경북 포항시 북구 양덕동 장량 LH 휴먼시아 아파트 3개 단지(총 71호)와 남구 오천읍 보광그린파크(54호), 남구 일월동 우성한빛아파트(25호), 남구 연일읍 대궁하이츠(10호) 등 6곳이다.
 
문제는 포항시가 파악하고 있는 이주대상 가구 수가 334가구에 이르는 상황에서 먼저 입주할 수 있는 임대주택이 160가구에 불과하다는 점이다.
포항 지진 이재민 주거용으로 지원되는 경북 포항시 북구 장량 LH 휴먼시아 아파트 전경. 포항=김정석기자

포항 지진 이재민 주거용으로 지원되는 경북 포항시 북구 장량 LH 휴먼시아 아파트 전경. 포항=김정석기자

 
흥해남산초 대피소에서 만난 한미장관맨션 주민 이모(35·여)씨는 "대성아파트처럼 언론의 집중 조명을 받은 아파트는 임대주택 입주 대상이 되고 다른 아파트는 사람이 살지 못할 정도로 파손이 됐어도 지원에서 소외된다"고 말했다. 이씨는 집안 곳곳에 균열이 간 모습을 찍은 사진을 기자에게 보여주며 "이렇게 사람 살 곳이 못 되는데 포항시에선 안전하다고 돌아가라고 한다"고 했다.
 
실제 포항시는 한미장관맨션에 사는 70가구에 대해선 건물 안전진단 결과 사용가능 판정을 내렸다. 한미장관맨션에 살던 이재민들이 임대주택 지원에서 제외된다는 뜻이다. 반면 대성아파트 E동과 대동빌라 주민들은 장량 LH 휴먼시아 아파트 임대주택 우선 입주 대상이다.
 
이씨는 "안전진단 결과 안전하다는 결과가 나온 건물이라도 위치에 따라 사람이 살 수 없을 만큼 부서진 곳도 있을 수 있다"며 "형평성 시비가 나오지 않도록 보다 세세한 기준을 세워 당국이 기준을 잘 잡아줘야 한다"고 지적했다.
 
20일 경북 포항시청 브리핑룸에서 이강덕 포항시장이 이재민 이주 대책과 피해 지원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포항시]

20일 경북 포항시청 브리핑룸에서 이강덕 포항시장이 이재민 이주 대책과 피해 지원 계획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사진 포항시]

나머지 이재민들도 임대주택 지원 대상에서 제외될까 봐 불안해했다. 흥해읍 주민 박모(55)씨는 "정부에서 지원하는 임대주택 물량은 제한적인데 이재민 수는 그보다 많으니 임대주택 지원 대상에서 탈락되는 경우도 많을 텐데 추운 겨울 길바닥에 나앉게 될까 봐 불안하다"고 했다. 
 
이와 관련해 포항시는 20일 브리핑을 통해 LH 임대주택 160가구 외에 원룸이나 다세대주택 등 민간 보유 주택을 추가로 지원하고 전세보증금 융자지원과 이자율 인하 등을 통해 340가구를 마련, 총 500가구의 임시 거처를 지원할 계획이라고 했다.
 
임대주택 지원 기간이 6개월에 그친다는 데 대한 불만도 많았다. 흥해남산초 대피소에 머무르고 있는 신모(59)씨는 "임대주택을 지원해 주더라도 6개월밖에 살지 못하면 별 도움이 안 된다. 주거 문제가 해결되고 생업으로 돌아갈 때까지 지속적인 지원을 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최경순(63·여)씨도 "6개월은 물론이고 2년도 힘들다. 집 잃어서 여기까지 온 사람들이 안 그래도 힘든데 몇 개월마다 이사하면서 살 수는 없다"고 했다.
 
일부 주민들은 LH 임대주택 역시 지진 피해에서 자유롭지 못한 것 아니냐고 불안감을 표시했다. 특히 장량 LH 휴먼시아 아파트의 경우 진앙(북구 흥해읍 망천리)과 4㎞ 거리에 있어 여진 피해에 노출될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20일 찾은 장량 LH 휴먼시아 아파트 1단지에는 여전히 15일 지진의 흔적이 남아 있었다. 15층짜리 한 아파트 건물은 계단실 층층마다 가로로 길게 실금이 나 있었고 금이 나면서 바닥에 떨어진 돌조각과 페인트 껍질도 그대로 바닥에 뿌려진 모습이었다. 이 아파트에 산다는 20대 주민은 "지진 후 벽에 실금이 났는데 불안하다"고 했다.
경북 포항시에서 발생한 규모 5.4 지진으로 이재민이 된 주민들을 위해 정부가 주거대책을 마련했다. 이재민 주거용으로 지원되는 경북 포항시 북구 장량 LH 휴먼시아 아파트 1단지 한 건물 내부에 지진 이후 생긴 실금이 보인다. 포항=김정석기자

경북 포항시에서 발생한 규모 5.4 지진으로 이재민이 된 주민들을 위해 정부가 주거대책을 마련했다. 이재민 주거용으로 지원되는 경북 포항시 북구 장량 LH 휴먼시아 아파트 1단지 한 건물 내부에 지진 이후 생긴 실금이 보인다. 포항=김정석기자

경북 포항시에서 발생한 규모 5.4 지진으로 이재민이 된 주민들을 위해 정부가 주거대책을 마련했다. 이재민 주거용으로 지원되는 경북 포항시 북구 장량 LH 휴먼시아 아파트 1단지 한 건물 내부에 지진 이후 생긴 실금이 보인다. 포항=김정석기자

경북 포항시에서 발생한 규모 5.4 지진으로 이재민이 된 주민들을 위해 정부가 주거대책을 마련했다. 이재민 주거용으로 지원되는 경북 포항시 북구 장량 LH 휴먼시아 아파트 1단지 한 건물 내부에 지진 이후 생긴 실금이 보인다. 포항=김정석기자

 
이재민들은 주거지원으로 제공되는 임대주택에 금이 가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다는 반응이다. 흥해남부초 대피소에 있는 신순옥(67)씨는 "안전하니까 우리보고 들어가라고 한 거 아니냐. 당연히 정부에서 검사를 싹 다한 거 아니냐"면서도 "우리는 거기라도 들어가야 한다. 지금 여기 대피소에서 무릎도 한 번 못 펴고 산다. 너무 힘들다"고 말했다.
 
대성아파트에 살다 이재민이 된 김모(47)씨는 "이재민들에게 임대주택을 지원해주는 것은 고맙지만, 지진에 대한 공포가 심한 이들은 고층 아파트에서 살기 힘들 수 있다"며 "가능하면 단층 또는 저층 건물도 지원해 주면 좋겠다"고 했다.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난 17일 오후 경북 포항을 방문해 지진 재해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국토교통부]

김현미 국토교통부 장관이 지난 17일 오후 경북 포항을 방문해 지진 재해현장을 둘러보고 있다. [사진 국토교통부]

 
지진으로 주택을 잃은 이재민들은 결국 정부가 주도하는 재건축 사업을 근본 해결책으로 꼽았다. 임대주택 지원으로는 한계가 있고, 천재지변으로 집을 잃은 만큼 집 주인에게 책임을 떠넘길 수도 없다는 주장이다.
 
대성아파트 주민 정말자(63·여)씨는 "임대주택 지원이나 전세보증금 융자 등은 모두 일시적인 대책일 뿐"이라며 "재건축을 통해 주민들이 원래 자신이 살던 집에서 다시 살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주는 것이 근본 대책"이라고 말했다.
 
포항=김정석·백경서 기자
kim.jungseo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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