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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한복판에 등장한 '낙태약 자판기'의 정체는

중앙일보 2017.11.19 17:03
19일 여성단체 '페미당당'이 서울시립미술관 입구 앞 좌측 인도에 '모두를 위한 미프진 자판기'를 설치했다. 자판기에는 경구용 피임약인 미프진 대신 비타민C와 젤리 등이 들어있다. 홍상지 기자

19일 여성단체 '페미당당'이 서울시립미술관 입구 앞 좌측 인도에 '모두를 위한 미프진 자판기'를 설치했다. 자판기에는 경구용 피임약인 미프진 대신 비타민C와 젤리 등이 들어있다. 홍상지 기자

19일 오후 서울 정동길에 자판기 한 대가 설치됐다. 10여 명의 사람들이 자판기 앞에 줄을 섰다. 차례를 기다려 100원짜리 동전을 넣고 자판기 레버를 돌렸다. 비닐로 포장된 물체가 '툭' 떨어졌다. 포장 안에는 아기곰 젤리와 비타민 C 제제, 그리고 작은 쪽지 하나가 들어 있었다. 쪽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왜 우리는 낙태약을 자판기에서 살 수 없을까.'

 
이 자판기는 여성단체 '페미당당'이 설치한 '모두를 위한 미프진 자판기'였다. 미프진은 임신 초기 자연유산을 유도하는 경구용 임신중절약이다. 페미당당 관계자는 "임신 초기 복용시 높은 확률로 안전한 '먹는 약'이 있는데 한국 여성들은 이 약의 존재 자체도 모르고 원치 않는 임신을 했을 때 위험하고 값비싼 임신중단 수술을 받고 있다"며 "인공 임신중단에도 여러 방식이 있고, 이는 여성의 자기결정권임을 알려야 한다는 취지에서 자판기 퍼포먼스를 기획했다"고 설명했다.
여성단체 페미당당이 페이스북에 올린 자판기 퍼포먼스 소개글. [인터넷 캡처]

여성단체 페미당당이 페이스북에 올린 자판기 퍼포먼스 소개글. [인터넷 캡처]

'부녀가 약물 기타 방법으로 낙태한 때에는 1년 이하의 징역 또는 200만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 형법 제269조, '낙태의 죄' 1항이다. 1953년 제정된 이 법을 두고 64년이 지난 2017년 폐지 찬반 논쟁이 한창이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는 23만 명 넘는 사람이 '낙태죄 폐지' 청원에 서명했고 현재 청와대는 답변을 준비 중이다.

 
낙태죄는 한국에서 사실상 사문화됐다. 1960년대 박정희 전 대통령 정부에서는 '산아제한' 정책을 펼쳐 낙태를 암묵적으로 인정했다. 1973년에는 모자보건법을 제정해 준강간에 의해 임신된 경우, 법률상 혼인할 수 없는 혈족 또는 인척 간 임신된 경우 등에 한해 수술을 허용하도록 했다. 그러나 여성의 원치 않는 임신은 법 조항에서 단 몇 줄로 정의하기엔 복잡한 사정들이 많았다. 지금도 해마다 수십만 건의 임신중절이 암암리에 이뤄지고 있는 것으로 추정된다.
 
그사이 낙태죄를 폐지하고 여성들의 자기결정권과 건강권을 지켜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다. 특히 찬성 측에서는 조국 민정수석이 2013년 쓴 논문에서 "태아의 생명 존중이라는 원칙은 소중하지만 동시에 현실 사회를 헤쳐 나가야 하는 여성의 삶에 대한 존중 역시 필요하다. 모자보건법 제정 후 40년이 흐른 지금 여성의 자기결정권 및 재생산권과 태아의 생명 사이의 형량은 새로이 이뤄질 필요가 있다"며 낙태 비범죄화론을 펼친 바 있어 이번이 낙태죄 폐지의 적기라고 보고 있다.
 지난 9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모인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소속 활동가들은 "낙태죄 폐지는 여성의 몸을 인구통제의 도구로 삼아온 역사를 마감해야 한다는 선언이자, 생명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기 위한 오랜 고민의 결과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지난 9일 오전 서울 세종문화회관 계단에 모인 '모두를 위한 낙태죄 폐지 공동행동' 소속 활동가들은 "낙태죄 폐지는 여성의 몸을 인구통제의 도구로 삼아온 역사를 마감해야 한다는 선언이자, 생명에 대한 사회적 책임을 묻기 위한 오랜 고민의 결과다"고 주장했다. [연합뉴스]

여성에게 책임이 쏠린 낙태죄의 허점도 거론된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최근 성명을 내고 "현재 여성들은 어렵게 찾아간 (낙태 시술) 병원에서 비위생적인 수술 도구를 보아도, 수술 이후 심한 출혈이 있어도 '낙태가 불법이기 때문에' 도움을 요청하거나 항의할 수 없다. 여성에게만 책임을 묻는 낙태죄로 여성의 건강과 안전은 심대히 위협받고 있다"고 주장했다. 김재련 법무법인 온세상 대표 변호사는 "준강간 등 예외적인 경우에만 낙태를 허용하는 모자보건법도 당사자인 여성의 결정이 아닌, 배우자 동의를 기본적으로 요구하고 있고 강간을 두고 법적 공방이 있을 경우 임신을 한 여성은 재판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려야 해 현실과 맞지 않는 법이다"고 지적했다.

 
종교계를 중심으로 한 낙태죄 폐지 반대 목소리 또한 작지 않다. 김현철 낙태반대운동연합 회장은 "낙태는 태아의 생명을 제거하는 것 뿐 아니라 낙태를 행하는 여성에게도 육체적·정신적·사회적으로 피해를 끼친다. 여성 등 모든 인간에게 자기결정권이 당연히 있지만 자궁 속 아기는 여성과 독립된 자녀다"고 말했다. 
 
여성이 홀로 아이를 키울만한 사회적 여건이 충분치 않은 상황에서 단순히 '여성의 자기결정권' 대 '태아의 생명권'이라는 낙태죄 찬반 구도 자체가 적절치 않다는 문제 제기도 있다. 비혼모협회 '인트리'의 최형숙 대표는 "한국 사회에서 비혼모들은 여전히 사회적 편견과 경제적인 어려움을 겪고 있는 상황이라 나조차 협회 문을 두드리는 젊은 임신부들에게 '애를 낳아야 한다'고 함부로 말하지 못한다. 형법의 찬반을 논하기에 앞서 이러한 현실을 봐야 한다"고 말했다.
 
홍상지 기자 hongsam@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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