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6000m 기슭, 설산에 쏟아지는 별빛 보자 슬픔이 밀려와 …

중앙선데이 2017.11.19 01:55 558호 23면 지면보기
[내가 짜는 힐링여행] 히말라야 횡단 트레일 <상>
2014년 3월 26일 칸첸중가 베이스캠프에서 문승영씨(오른쪽)가 포터 딥과 환호하고 있다. [사진 문승영씨]

2014년 3월 26일 칸첸중가 베이스캠프에서 문승영씨(오른쪽)가 포터 딥과 환호하고 있다. [사진 문승영씨]

평범했던 젊은 날, 친구를 따라 우연히 올랐던 한 겨울 태백산에서 나는 산의 매력에 흠뻑 빠져 버렸다. 지리산·설악산부터 시작해 결국 히말라야까지 발길을 돌렸다. 전문 산악인들의 전유물인 줄 알았던 히말라야에는 나 같은 평범한 사람들을 위한 트레킹 코스도 많았다. 장대한 설산은 물론이고, 자연에 순응하며 살아가는 순박한 사람들이 보여 주는 정감 어린 시선은 너무도 신선했다. 그렇게 히말라야에 마음을 빼앗겨 버렸고, 그것을 운명이라 생각했다.

가이드·포터 등 10명과 함께한
칸첸중가~에베레스트 40일 장정

눈보라 뚫고 급경사 빙벽 넘다
웨스트 콜 아래서 헤매다 비박
얼어죽을 수 있지만 결국 잠들어

 
결국 파키스탄 K2 트레킹에서 만난 남자와 결혼했다. 신혼 여행지는 당연 히말라야였다. 첫 목적지는 히말라야 횡단 트레일(Great Himalaya Trail)의 동쪽 출발점인 칸첸중가였다. 히말라야 산맥을 동서로 횡단하는 이 트레일은 전체 길이가 1700㎞에 달한다. 해발 5000~6000m에 달하는 고개들을 통과하는 하이 루트와 상대적으로 고도가 낮은 지역을 지나는 로우 루트가 있다. 우리가 선택한 하이 루트는 어렵고 위험한 셰르파니 콜과 틸만 패스를 넘어야 하는 40일짜리 험난한 장정이다.  
 
 
8일 걸은 끝에 칸첸중가 주봉 아래 도착  
고산족의 민속주인 똥바. [사진 문승영씨]

고산족의 민속주인 똥바. [사진 문승영씨]

2014년 3월 16일 네팔의 수도 카트만두에서 경비행기로 40분을 날아 수케타르에 도착했다. ‘다섯 가지 보물’을 뜻하는 칸첸중가의 다섯 봉우리와 반가운 얼굴들이 한눈에 들어왔다. 이전에 나와 트레킹을 했던 요리사 마카르와 포터 람이었다. 우리는 서로 손을 마주 잡고, 포옹을 하며 재회를 자축했다. 우리 팀의 가이드인 쭈레는 푸근한 인상었지만 25년 경력의 베테랑이었다. 숙소 주인인 사우지는 순박한 미소와 함께 고산족의 민속주인 똥바를 권한다. “똥바가 맛있다”고 엄지를 내미니 함박웃음을 짓는다.  
 
산길을 걸어 도착한 군사(3595m)에서 고소 적응을 한 뒤 다시 칸첸중가 베이스캠프가 있는 팡페마(5143m)로 향했다. 꼬박 8일을 걸어 만난 세계 3위 봉우리 칸첸중가(8586m)는 히말라야의 여왕이라 불리기에 충분할 만큼 아름답고 웅장했다. 강렬한 태양 아래 은빛 자태를 뽐내며 날카롭게 솟아오른 칸첸중가 주봉과 유연한 곡선을 그리며 그 곁을 지키고 있는 서봉 얄룽 캉(8505m)은 몸서리 칠 만큼 황홀했다.  
 
나는 이틀 만에 총 10명인 스태프들의 이름을 모두 외웠다. 그들은 내가 이름을 불러 줄 때마다 좋아했고, 길을 걷다 잠시 쉬어 갈 때면 자신들의 옆자리를 내게 내줬다. 숙소에 도착하면 포터들의 찢어진 장비와 옷가지들을 거의 뺏다시피 가져와 꿰매 주기도 했다. 눈 쌓인 낭고 라(4695m)를 넘을 때 자외선 차단제를 발라 줬다. 처음에는 다들 손사래를 치며 쑥스러워하더니 곧 가만히 얼굴을 내밀곤 했다. “네팔 아내는 맨날 잔소리만 하는데 한국 여자들은 이렇게 상냥하니 한국 남자들은 행운아야”라는 가이드 쭈레의 농담에 모두들 박장대소한다.  
 
40일간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스태프들. [사진 문승영씨]

40일간 생사고락을 함께했던 스태프들. [사진 문승영씨]

칸첸중가에서 캉 라(5159m) 고개를 넘으면 마칼루 지역으로 들어서게 된다. 캉 라로 오르는 길은 경사가 급한 데다 쌓인 눈이 많아 발을 딛기가 무섭게 빠져 버렸다. 룸바 삼바 산 기슭에 다다르자 엄청난 강풍과 함께 눈보라가 덮쳤다. 자칫 폭 30㎝ 남짓한 길에서 미끄러지면 100여m 아래로 굴러 떨어질 수 있기에 간담이 서늘했다. 눈보라를 뚫고 캉 라에 도착한 나는 감격에 겨워 춤을 췄다. 극한의 고통이 찬란한 환희로 뒤바뀌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포터들의 행색은 참담했다. 바지는 형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다 찢어졌고 눈은 모두 퀭하니 들어가 초점이 없었다. 말할 기운조차 남아 있지 않은 듯 힘겹게 짐을 내려놓고는 맨바닥에 누워 일어나지를 못했다. 그저 지금 이 순간 지친 그들을 위로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다는 서글픈 현실에 눈물만이 흐를 뿐이었다.
 
 
마을도 없는 길 닷새 걸어 마칼루로  
캉 라 고개로 오르는 길. [사진 문승영씨]

캉 라 고개로 오르는 길. [사진 문승영씨]

세계 5위 봉인 마칼루(8481m)로 가는 길은 칸첸중가 지역보다 고도가 낮다. 하지만 검은 암석으로 덮인 가파른 경사와 눈사태의 위협 등으로 ‘히말라야의 검은 귀신’으로 불리는 마칼루로 향하는 길이 쉬울 리가 없다. 특히 캉 라에서 마칼루 베이스캠프(4870m)까지 닷새 동안 마을이 없는 구간은 에베레스트를 등반한 가이드 쭈레조차 혀를 내두를 정도로 위험했다. 모룬 포카리(3954m)로 이어지는 길은 깎아지른 절벽 위에 난 미끄러운 산길을 걸어야 했고, 깔로 포카리(4192m)로 가는 길에는 눈사태의 흔적이 또렷이 남아 있는 설원을 건너야 했다. 강냉이만한 싸락눈은 쉼 없이 얼굴을 때렸다.  
 
마칼루 베이스캠프에서 거칠고 황량한 모레인(빙퇴석) 지대를 지나 셰르파니 콜 베이스캠프(5688m)에 도착했다. 이제 이스트 콜(6100m)과 웨스트 콜(6135m)을 넘어 에베레스트 지역으로 들어가게 된다. 별빛조차 보이지 않는 칠흑 같은 어둠에 휩싸인 셰르파니 콜 베이스캠프를 나섰다. 겹겹이 껴입은 옷 사이로 파고 드는 살을 에는 바람에 잠시만 걸음을 멈춰도 몸서리가 쳐진다. 얼어붙은 눈 평원을 가로질러 얼마나 걸었을까 환하게 밝아 오는 새벽을 깨고 웅대한 모습을 드러낸 마칼루와 저릿한 추위 속에 오색 빛으로 물든 하늘은 순식간에 세상이 완전히 바뀐 것 같은 느낌이었다. 거대한 성벽과도 같은 이스트 콜의 정상에는 몸이 휘청거릴 만큼 바람이 강하게 불었다. 하지만 우리는 추위도 잊은 채 앞에 보이는 순백의 설원과 그 너머에 넘실거리며 솟아 있는 히말라야의 영봉에 마음을 빼앗겼다.  
 
웨스트 콜 기슭에서 밤을 새운 좁은 테라스. [사진 문승영씨]

웨스트 콜 기슭에서 밤을 새운 좁은 테라스. [사진 문승영씨]

웨스트 콜을 지나 베이스 캠프로 내려가는 길은 기가 질릴 만큼 급경사의 빙벽이었다. 눈보라 속에서 우박처럼 쏟아지는 낙석을 피해 한 피치 한 피치씩 짐과 스태프들이 교대로 내려오는 하산길은 더딜 수 밖에 없었다. 해가 지면서 우리는 하강 지점 바로 옆 작은 테라스에 모였다. 쭈레는 한 시간 거리인 바룬체 베이스캠프에서 밤을 보내고 짐은 다음날 찾자고 제안했다. 헤드랜턴 불빛에 의지해 출발한 우리는 얼어붙은 눈길을 헤메기 시작했다. 정신을 차리고 보면 조금 전에 지난 곳에 다시 서 있었다. 악천후 속에 방향 감각을 잃고 같은 지점을 맴도는 링반데룽(환상방황)이었다. 두 시간을 헤맨 끝에 하강한 곳으로 되돌아가 비박(비상시 텐트 없이 노숙하는 것)을 하기로 했다.  
 
그렇게 웨스트 콜 아래로 되돌아간 것이 오후 11시였다. 밤은 길었다. 열두 명이 겨우 쪼그려 앉을 수 있는 테라스 텐트 하나를 위쪽 바위에 걸쳐 커튼처럼 늘어뜨렸다. 해가 뜰 때까지 배고픔과 추위, 암흑과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견뎌 내야 했다. 어느새 눈보라가 그친 하늘에는 밝은 달빛 아래 하나 둘 떠오른 별들이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은빛 설산으로 쏟아져 내리는 별빛을 바라보자 끝없는 슬픔이 밀려오며 울음이 터졌다. 무심한 히말라야의 밤하늘은 우리가 이곳에 있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유성우를 뿌리며 빛의 축제를 연다. 이토록 아름다운 밤하늘을 본 적이 있을까? 온몸의 긴장이 풀리면서 졸음이 몰려왔다. 잠든 사이 얼어죽을 수 있다는 위기감 속에서도 점점 무거워지는 눈꺼풀은 어쩔 도리가 없었다. 나는 그렇게 잠이 들어 버렸다.
 
 
문승영 오지여행가
아이디 ‘설악아씨’로 잘 알려진 38세의 오지 여행가. 2014년부터 칸첸중가에서 마칼루·로체·에베레스트·마나슬루·안나푸르나 등을 거쳐 힐사에 이르는 1700㎞ 길이의 네팔 그레이트 히말라야 트레일(GHT) 하이 루트를 횡단하고 있다. 올 연말 마지막 구간에 도전한다. 이번 여행기에는 GHT의 동부 루트인 칸첸중가~에베레스트 구간 도전기를 담았다. 

선데이 배너

공유하기

중앙일보 뉴스레터를 신청하세요!
광고 닫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