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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답하라 1977

중앙선데이 2017.11.12 01:00 557호 29면 지면보기
공감 共感
원산대반점(그랜드 호텔 타이베이) 레드카펫이 깔린 계단에 걸터앉은 천추샤.

원산대반점(그랜드 호텔 타이베이) 레드카펫이 깔린 계단에 걸터앉은 천추샤.

1977년은 내게 특별한 해다. 나는 그해 11월 타이베이에서 열리는 제14회 금마장(金馬奬) 영화제에 참석하기 위해 처음 대만 땅을 밟았다. ‘사랑의 스잔나’로 받은 최우수 여우주연상은 내가 영화계 데뷔 이후 처음으로 받은 상이기도 했다. 당시 영화사 골든하베스트(嘉禾)와 함께 떠난 홍콩 대표단에는 나와 호흡을 맞춘 아비(阿B)를 비롯해 저우룬파(周潤發) 등 많은 배우가 포함돼 있었다. 나이로 보나 경력으로 보나 가장 어린 축에 속하는 신인이었던 우리는 모든 게 처음이었다. 빡빡한 일정 동안 숙소 배정이며, 인터뷰 조율 등을 능숙하게 처리하는 선배들을 쫓아다니며 하나라도 더 배우면 그저 행복한 시절이었다.
 
지난 여행에서 서예 동료들과 함께 묵었던 그랜드 호텔 타이베이(원산대반점)는 40년 전에는 너무 높아서 차마 쳐다볼 수도 없는 곳이었다. 국빈들이 주로 초청받아 머무는 곳으로 다녀간 국가 원수나 대통령도 여럿이었다. 당시만 해도 정치계와 예술계의 경계는 매우 분명해 함께 어울리기 힘든 상황이었다. 대선 때면 연예인들도 특정 후보에 대한 지지 선언을 하고 유세 활동에 참여하는 지금과는 매우 달랐다. 나 역시 ‘최우수 여우주연상’이라는 직함을 달고 있음에도 고귀한 호텔과는 거리가 먼 신분이었다.
 
원산대반점은 타이베이 중심가에 있지만 산 위에 자리해 있다. 하루는 대만에서 활동하던 딩산시(丁善璽) 감독과 부인이 홍콩에서 온 어린 친구들에게 타이베이 풍광을 구경시켜 주겠다며 나와 저우룬파를 차에 태우고 인근 베이더우(北投) 온천지구로 향했다. 야경을 보러 가는 건가 싶어 잔뜩 신난 우리의 기대와 달리 딩 감독은 어둡고 외진 나무그늘 밑에 차를 세우더니, 몸을 기울여 산 아래쪽을 한번 보라고 했다. 달빛 아래 어스름하게 비친 홍등가에는 크고 작은 여관들이 모인 길 위로 오토바이를 몰고 가는 남자들과 그 뒤에 타고 있는 어여쁜 여자들이 가득했다. 아마 저들은 특별한 서비스를 제공할 테지. 어린 우리에게는 분명 새로운 광경이었다.
 
딩 감독은 연예계에 발을 디딘 지 얼마 되지 않은 두 젊은 배우에게 그가 찍은 멜로 영화에 대해 들려 줬다. 마부와 그 뒤에 타고 있는 여인의 사랑 이야기로 이곳을 배경으로 찍었다고 했다. 안타깝게도 영화 심의위원회에서 너무 민감한 소재인 데다 체통을 지키지 못한다는 이유로 상영이 금지됐다고 했다. 당시 나는 정치에 대해서는 더더욱 문외한이었지만 감독의 헛헛한 마음만큼은 고스란히 전해졌다.
 
이미 늦은 시간이었지만 딩 감독은 “외지에서 온 손님은 제대로 대접해야 한다”며 우리를 데리고 원산대반점으로 향했다. 그때 우리는 아이스크림을 먹었다. 감독은 거기서 그치지 않고 나와 저우룬파에게 레드카펫이 깔린 웅장한 계단 위에 서서 손을 맞잡아 보라고 말했다. 마치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사진을 찍을 테니 앞으로 다가올 아름다운 미래에 대해 동경하는 듯한 표정을 지어 보라는 디테일한 주문과 함께 말이다. 나는 저우에게 무슨 생각을 했는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묻지 않았다. 추측하건대 그는 아마도 세계적인 스타가 되는 것을 꿈꿨을 것이다. 하지만 내 기억이 맞는다면 나의 꿈은 소박했다. 언젠간 이 호텔에서 묵어볼 수 있을까? 향후 이렇게 간단한 일이 될 줄도 모르고 너무 작은 소원을 빈 셈이다.
 
순식간에 40년이란 시간이 흘렀다. 원산대반점은 이제 모두에게 개방된 호텔이 됐고, 딩 감독 부부는 이미 세상을 떠나 그 자리에 없었다. 그가 말했던 그 영화는 이제 해금 조치가 됐을까. 나와 저우룬파가 함께 찍은 사진을 그는 어디에다 두었을까. 모두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사진 속 두 젊은이가 딩 감독으로부터 좋은 기운을 받은 것은 분명하다. 그해 이후 우리 두 사람은 마음껏 연기할 기회를 차고 넘치게 잡았으니 말이다. 단지 달라진 것이 있다면 나는 7년 만에 은퇴했고, 그는 쉬지 않고 꾸준히 정진한 결과 아직도 레드카펫 위의 삶을 살고 있다는 것이다. 그때 다른 소원을 빌었다면 지금의 내 모습도 달라졌을까. 그 역시 아무도 모를 일이다.
 
 
천추샤 (陳秋霞·진추하)
라이언팍슨 파운데이션 주석
onesummernight76@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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