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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수정의 포린 어페어즈

트럼프, 역(易 )수표외교(checkbook diplomacy) 하고 떠났다

중앙일보 2017.11.11 06:06
 
 

중·일 등이 아프리카 등서 해온 선심 외교
1위국가 트럼프가 한·중서만 380조원 이상 챙겨
'가치 외교' 실종하고 비즈니스 계약서만
핵심 순방 외교를 국내 지지율에 활용

아시아 신 정책 그림 제지도 안해
"미국과 중국의 파워 시프트 이정표"
시진핑,민감 이슈 의전과 돈으로 무마
미중간 본격 네트워킹 전쟁 시작될 것

  호화로운 의전과 380조원 짜리 수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한·중·일 3국이 그의 방문 기간 끊어준 이 수표를 주머니에 챙기고 10일 APEC(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 정상회의가 열리는 베트남으로 향했다. 트럼프가 서울과 베이징, 도쿄에 남긴 것은 무엇일까. ‘트럼프가 이끄는 미국’을 미국 그 자체의 파워와 동일시 할 순 없겠지만, 적어도 트럼프의 이번 방문은 국제질서 체스판이 변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하나의 사례로 주목받고 있다. ‘부상하는 중국에 미국이 대응하는 과정에 생긴 이정표.’ ‘중국에 아부하는 시대의 시작’ 미국 뉴욕타임스(NYT) 10일자 기사의 한 대목이다. 
 
지난 8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부부가 베이징 자금성에서 사진 포즈를 취하는 동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엄지 손가락을 올려 보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지난 8일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 부부가 베이징 자금성에서 사진 포즈를 취하는 동안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엄지 손가락을 올려 보이고 있다. [로이터=연합뉴스]

 
트럼프는 지난 5일부터 일본, 한국, 중국을 차례로 찾았다. 일본은 추후 ‘과잉 의전’논란이 일 정도로 대접했고, 일찌감치 ‘국빈 플러스’의전을 공언한 중국은 자금성과 천안문 광장까지 내줬다. 한국도 최선을 다했다. 신각수 전 외교부 차관은 “중국은 원래 공들인 의전으로 실리를 얻어내는 외교 전통이 오래전부터 있었다”며 “이번엔 3국간 의전 경쟁이 벌어진 측면도 있다”고 말했다. 

이런 호화 의전은 1차적으로는 무역 불균형 등 이슈에 대한 트럼프의 강한 압박에 대응하기 위한 차원이고 한편으론 미국의 힘이 여전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방증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번 트럼프의 외교를 통해 미국은 국제사회 리더의 역할을 더 이상 하지 않고 있음을 보여줬다는 평가다. 먼저, 취임 10개월 째인 미국의 대통령이 92년 조지 H.W 부시 이후 최장기 아시아 순방에 나서면서도 자국의 대 아시아 정책의 그림을 제시하지 않았다. 이성현 세종연구소 상임 연구위원은 “오바마 대통령의 ‘피봇 투 아시아’(Pivot to Asia,아시아 중시 정책) 를 잇는 트럼프 행정부의 정책은 분명치 않다”고 말했다.   
 
그 대신 트럼프는 ‘아메리카 퍼스트’에 기반한 경제 실익 챙기기로 일관했다. 한·미 정상회담 공동언론발표문(A4용지 5장) 내용의 절반은 한국의 무기 구매 및 투자 액수(총 100조원에 이른다)다. 중국에서도 2535억 달러(약 282조원) 규모 무역협정을 체결하고 비즈니스 계약서 같은 합의문을 공개했다. 중산(鐘山) 중국 상무부장은 세계 역사상 유례 없는 액수라고 평가했다.일본도 상당 규모 투자협정을 했으나 구체적으로 수치가 나오진 않고 있다.
 
 9일 오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미·중 기업 대표 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양국 기업 대표들이 무역 협정을 체결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미중은 이날 2천500억달러(280조원 상당) 규모의 무역 협정을 맺었다. [연합]

9일 오전 중국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미·중 기업 대표 회담에서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이 양국 기업 대표들이 무역 협정을 체결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미중은 이날 2천500억달러(280조원 상당) 규모의 무역 협정을 맺었다. [연합]

 
‘수표 외교’(checkbook diplomacy)란 말이 있다. 외교 영향력 확대를 위해 수표장(체크북)을 들고 다니며 경제 지원, 투자를 하고 다니는 걸 뜻한다. 중국의 대 아세안, 아프리카 외교가 대표적이다. 걸프전 후 독일과 일본처럼 전략지역을 공략하기 위해 두 나라가 경쟁적으로 수표외교를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번엔 최강국 미국이 ‘역(易) 수표 외교’를 하고 다녔다. 세계 경제력(GDP 기준) 1위인 미국이 각각 2·3·12위인 중국·일본·한국에 대해 ‘무역불균형’‘안보무임승차’로 압박하고 방문해 수표를 뜯어간 셈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7일 경기도 평택 주한미군 캠프 험프리스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설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일자리"을 얘기했다.김상선 기자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이 7일 경기도 평택 주한미군 캠프 험프리스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지켜보는 가운데 연설하고 있다. 여기에서도 트럼프 대통령은 "미국 일자리"을 얘기했다.김상선 기자

 
게다가 트럼프는 캠프 험프리스에서 조차 “미국의 일자리 창출을 위해 내가 여기 왔다”며 미국민을 대상으로 한 발언을 이어갔다. 국내 지지율이 최저치로 떨어진 트럼프의 내치용 외교였다는 얘기다. 『신세계 질서와 한국』을 쓴 이백순 전 미얀마 대사는 “미국이 외교를 국내 정치에 대놓고 이용한 드문 사례”라고 말했다. 
예상한 일이긴 하지만, 그는 시진핑(習近平) 중국 국가 주석에게 구금 상태로 숨진 노벨상 수상자 류사오보 등 인권 문제를 제기하지 않았다. 인권과 민주주의, 법질서 같은 ‘가치 외교’로 국제 질서의 꼭대기에 서 있던 미국이 더이상 아니었다. 시 주석 입장에선 인권 문제 제기로 불편했던 전임 미 대통령들 보다 훨씬 편한 상대를 만난 것이다. 이런 점에서 “트럼프가 미국의 지도력을 훼손하는 행동을 하고 있다”(하버드 대 알렉산더 괴흘라흐 교수) 같은 지적도 잇따른다. 외교 소식통은 “중국은 트럼프를 돈으로 민감한 이슈를 무마했다”고 분석했다. 트럼프는 그러나 국내에선 근본적인 미·중 통상 문제는 놔두고 테이블위의 수표만 걷어왔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아베 일본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에게도 극진하게 대접했다. 지난 3일 트럼프 보다 먼저 도착한 이방카에게 만찬을 베푼 아베 총리. 이방카는 이 사진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연합]

아베 일본 총리는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의 장녀 이방카에게도 극진하게 대접했다. 지난 3일 트럼프 보다 먼저 도착한 이방카에게 만찬을 베푼 아베 총리. 이방카는 이 사진을 자신의 페이스북에 올렸다.[연합]

 
북핵 문제도 중국의 체면을 세워 주며 마무리했다. “우리(미·중)가 손 잡으면 북한의 해방과 자유를 실현할 수 있을 것이다. 여러분의 주석(시진핑을 지칭)이 노력하면 해결될 수 있다”(트럼프) “할 수 있는 일은 다하고 있다”(시진핑) 는 말을 각자 했을 뿐, 공동의 구체적 해법은 없었다. 중국의 대북 원유 공급 중단 등 독자제재안도 진전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좀더 지켜봐야겠지만, 트럼프가 북핵에 대한 현실적 비전은 없이, 안보를 레버리지로 경제 실익을 취하고 있는 것 아니냐는 의구심도 나오는 상황이다.
 
어쨋든 트럼프·시진핑의 담판은 각자의 체면을 살리면서 충돌 없이 끝났다. 하지만 트럼프 귀국 후 미·중의 갈등은 구조적 경쟁관계로 돌입할 것이란 분석이 많다. 이성현 위원은 “19차 당대회를 통해 도광양회(韜光養晦·힘이 생길 때까지 조용히 기다림)의 파기를 선언한 시진핑은 공격적 외교를 가속화할 것”이라며 “주변국을 불러들이는 네트워킹 전쟁이 치열해 질 것”이라고 말했다. 
 
한·미 언론보도문에 포함됐지만 청와대가 부인하면서 논란이 된 ‘인도·태평양 라인’도 그 한 예다. 신 전 차관은 “향후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47개국을 잇는 육해상실크로드)와, 미·일·인도·호주의 ‘인도·태평양 라인’이 대결하는 시대가 펼쳐질 수 있다”고 전망했다. 신 대사는 “중국이 미국을 위협할 단계까지 가려면 수십년은 더 걸릴 것”이라며 “그 사이에 한국은 신뢰 외교를 토대로 통일을 이루고, 주변국에 빨려 들어가지 않도록 국력을 키워야 한다”고 말했다.  

 
김수정 외교안보선임기자 
kim.su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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