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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한파 왕천, 그가 없었으면 시진핑은 고졸?

중앙일보 2017.11.10 17:00
19차 당 대회 이후 새로운 정치국원 명단이 발표됐습니다. 공산당원 8800만 명 중 25명 만이 선택을 받는, 그래서 영도자라는 칭호를 받는 중국 권력의 핵심이지요. 한데 의외의 인물이 눈에 띕니다. 왕천(王晨·67) 전인대(국회 격) 부위원장입니다. 그가 무난하고 중후하며 탁월한 조정자라는 점은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하지만 그는 공직 생활 대부분을 언론에서 보낸 인물입니다. 새로 정치국원에 오른 인물 면면을 보면 지방이든 중앙이든 다양한 행정 경험을 거쳤고 리더십에 대한 험난한 검증을 받았다는 점이 공통점입니다. 물론 그는 일선 행정 경험이 전무합니다. 그의 발탁이 파격이라는 말이 나온 이유입니다.
중국 언론계 관계자들과 대화하는 왕천(좌) [사진 CNTV)

중국 언론계 관계자들과 대화하는 왕천(좌) [사진 CNTV)

하나 더 있습니다. 2017년 현재 나이는 67세. 통상 정치국원에 오를 때 나이가 68세면 선임이 안 되는 게 공산당 인사의 관례지요. 이른바 칠상팔하(七上八下· 최고 지도부 선임 시 나이가 67세까지 가능, 68세 이상이면 퇴직) 관례 때문입니다. 아슬아슬하게도 단 한 살 차이로 그는 이 관례를 뛰어넘었습니다. 이 또한 의외라면 의외입니다. 모두가 시진핑 주석의 강한 추천과 지원 때문에 가능했다고 합니다.
 
사실 그는 시진핑 주석의 오랜 지기(知己)입니다. 공직자에게 있어 최고 통치자와 친분이 있다는 것보다 뛰어난 실력은 없겠지요. 둘의 만남은 70년대 초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왕은 1969~70년 산시(陝西) 성 옌안(延安) 이쥔(宜君) 현으로 하방 돼 지식청년(知靑)으로 가혹한 현장 체험을 했습니다. 이후(1970~1974년) 그는 이쥔 현에서 당 간부로 일합니다. 지식 청년이란 농촌으로 하방 돼 현장에서 실습을 겸한 재교육을 받는 고졸 혹은 대학생들을 말합니다. 50년대부터 문화혁명이 끝난 1976년까지 계속됐는데 무려 1200여만 명이 하방 됐지요.  
옌안 이쥔현 [사진 바이두 백과]

옌안 이쥔현 [사진 바이두 백과]

인연이라는 게 참 묘합니다. 시진핑 주석도 당시 지식 청년(1969~1975년)으로 옌안의 량자허(梁家河) 촌에 있었습니다. 그 넓은 중국에서 시 주석과 왕 부위원장이 바로 옆 동네에서 그것도 같은 해에 하방 생활을 시작했으니 얼마나 동질감을 느꼈겠습니까. 그리고 둘은 똑같이 당 지부 간부까지 맡습니다. 바로 옆 동네나 다름없는 농촌에서 둘은 일주일이 멀다 하고 만나 당과 농촌 문제를 얘기했다고 합니다.  
 
둘이 형제처럼 지낼 수밖에 없는 또 다른 이유도 있습니다. 둘 다 당시로써는 천연기념물 같은 베이징 출신이었습니다. 시 주석의 고향은 산시(陝西) 성 푸핑(富平)으로 기록돼 있는데 이는 부친인 시중쉰(習仲勳) 전 부총리의 적(籍)을 따른 것으로 실제는 베이징에서 출생해 베이징에서 초중등 교육을 받았지요. 시 주석은 국가 고위직 자녀들이 다니는 베이징 101 중학교를 졸업했습니다. 둘은 산간 외지에서 베이징 향우회 회장이자 멤버였던 겁니다.
옌안 량자허 [사진 바이두 백과]

옌안 량자허 [사진 바이두 백과]

왕은 시진핑이 지식 청년을 마치고 칭화대학에 입학하도록 적극적으로 추천합니다. 당시에는 당에 대한 충성이 강하고 업무 실적이 뛰어난 당원들을 상대로 대학 추천제가 유행했는데 추천자는 현지 당 위원회 간부였습니다. 왕의 추천 덕에 시 주석은 칭화대 화공과에 진학해 1979년 졸업합니다. 왕의 추천이 없었다면 시진핑의 칭화대 인맥은 없었을 수도 있었다는 얘기입니다.  
 
이렇게 쌓인 둘의 인연은 1974년 왕이 광명일보(光明日報) 기자로 전보되면서 이심전심(以心傳心)의 관계로 진화합니다. 왕은 20년 동안 당 중앙 기관지 중 하나인 광명일보에서 언론인의 삶을 걷습니다. 물론 그는 이 기간에 시진핑이 17년 동안 근무했던 푸젠(福建) 성에 대한 보도를 게을리하지 않으며 시 주석을 챙기지요. 시진핑의 언론 관리사 역할을 한 겁니다.
 
광명일보는 1949년 신중국 건국과 함께 민주당파 주도로 창간됐습니다. 초창기에는 비공산당원에게 마르크스 레닌주의와 마오쩌둥 사상 전파에 주력했으나 이후 상업적 성격을 띠면서 지금은 기업과 과학기술, 생활 밀착형 기사를 내보내면서 미디어그룹으로 성장했지요. 이 모든 게 20년 가까이 광명일보에서 근무하며 총 편집에 오른 왕천 부위원장의 공이라는 데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2016년 일대일로 포럼에서 발언하는 왕천 [사진 인민망]

2016년 일대일로 포럼에서 발언하는 왕천 [사진 인민망]

2001년 인민일보 총 편집으로 자리를 옮긴 왕천은 이듬해 사장 자리에 오르며 중국 선전 부문 최고의 권력을 예약합니다. 그리고 공산당 중앙 제1 기관지인 인민일보 개혁에 몰입합니다. 사회주의 사상 선전은 물론 과감한 투자를 통해  다가오는 디지털 시대에 대비합니다. 오늘날 인민일보가 세계 최고 디지털망과 독자, 그리고 인력을 가진 언론사로 성장한 것은 100% 그의 리더십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탁월한 언론 경영 능력에 힘입어 2008년 중앙 선전부 부부장, 국무원 신문 판공실 주임(장관급), 국가인터넷 정보 판공실 주임 자리를 장악합니다. 이때 시 주석은 막 정치국 상무위원에 올라 미래 대권 준비에 시동을 걸지요. 권력 장악에 있어 언론, 중국에서는 선전의 힘이 얼마나 큰지 서로 알고 있었던 겁니다.  
 
2013년 3월 시진핑 총서기가 국가 주석에 오르자 왕은 곧바로 전인대 부위원장 겸 비서장에 오릅니다. 시 주석 취임 이후 전면적인 개혁을 위한 법과 제도 마련을 책임진 겁니다. 시 주석 취임 이후 지난 4년간 계속된 모든 부문의 개혁 법안과 전인대 통과를 왕천이 진두지휘한 셈입니다.
2009년 한국을 방문해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회장(우)과 악수하는 왕 정치국원 [사진 중앙포토]

2009년 한국을 방문해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회장(우)과 악수하는 왕 정치국원 [사진 중앙포토]

언론인 출신인 그는 지한파이기도 합니다. 특히 한국의 중앙일보와는 인연이 깊습니다. 베이징 올림픽을 1년여 앞둔 2007년 5월, 홍석현 당시 중앙일보 회장이 인민일보를 방문해 양사 미디어 교류 활성화 방안 등을 집중 논의했지요. 왕 사장은 “한국을 대표하는 중앙일보가 중국의 다양한 면모를 적극적으로 보도했다"라고 평가한 후 “올림픽 취재와 보도 과정에서도 양측이 다각도로 협력하자"라고 제의합니다. 이에 따라 양사는 올림픽 기간 중 전방위 취재 협력을 통해 심층적이고 매력적인 기사를 쏟아냈습니다. 국무원 판공실 주임이던 2009년 4월 그는 다시 한국을 방문해 홍석현 회장과 “두 나라 간 오해를 없애고 우정을 넓히려면 양국 언론의 역할이 핵심”이라는 데 인식을 같이하며 우정을 쌓았습니다.  
 
차이나랩 최형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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