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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시윤 전 헌법재판관 “과거에 집착하다 미래 잃을까 걱정”
 

"적폐청산 보면 옛 묫자리 소송 생각나"
"탄핵 하자 있지만 결과 승복이 법치"
"고등부장제 없애 법관 관료화 막아야 "

옛날 묫자리 소송이 생각납니다. 한말에 삼도득신법(三度得伸法)이란 게 있었어요.”

 
"요즘 법원과 검찰에서는 '적폐청산' 문제가 가장 뜨거운 주제"라는 얘기를 하자 이시윤(82) 전 헌법재판관은 대뜸 묫자리 소송 이야기를 꺼냈다. 그는 이렇게 말을 이었다. 
 
“조선시대에는 고을마다 묫자리 소송이 많았어요. 조상 묫자리가 자손들의 미래를 좌우한다는 생각에 ‘왜 내 조상 자리에 네가 묘를 썼냐’고 싸우는 거죠. 원(員·수령)이 바뀔 때마다 ‘전관 율사를 동원했다’ ‘원에게 뇌물을 줬다’는 등의 이유로 이전 재판에 불복하는 소송이 잇따랐죠. 그러다 보니 대대손손 소송에 매달리게 돼 ‘소송으로 흥한 자 소송으로 망한다’는 말이 나왔고 송사를 매듭짓게 해달라는 굿판까지 벌어지곤 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하려고 만든 게 ‘삼도득신’입니다. 삼판이선승제. 일종의 기판력 사상이 도입된 것입니다.”

지난 5일 서울 구기동 자택에서 만난 이시윤 전 헌법재판관은 "사람에 의한 통치가 아닌 법에 의한 지배가 법치주의다. 재판 진행은 납득할 만 해야 하고, 결과에는 승복해야 법치주의가 유지된다"고 말했다. 프리랜서 이원근

‘적폐청산이 묫자리와 무슨 관계가 있다는 말일까.’ 이런 의문이 스치는 사이 그는 말을 이었다.

 
“요즘 세태를 보면 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라는 기초적 법의식 또는 기판력(旣判力) 사상이라는 게 있는 나라인가 걱정됩니다. 적폐청산이라는 명분으로 과거사 규명에 몰입하는 것은 법적 견지에서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과거에 대한 냉철한 반성과 성찰이라는 의미를 가진 부분도 있고 반드시 단죄해야 할 사안도 있겠지만 같은 일에 대한 판단을 정치적으로 되풀이하는 것은 법적 안정성에 도움이 되질 않습니다. 과거에 매달려 미래로 나아가지 못하는 모습이 조선시대 묫자리 소송과 닮지 않았습니까. 시간이 흐를수록 진실은 희석된다고 합니다. 문서도 사라지고 증인도 사라져 되풀이한다고 진실이 규명된다는 보장도 없지요.”
 
기판력(旣判力)이란 어떤 사안에 대한 판결이 확정되고 나면 당사자들은 다른 소송에서도 이와 모순되는 주장을 할 수 없게 되는 확정판결의 효력을 의미하는 말이다. 그는 소송절차법에 새겨진 법의 정신을 통해 탄핵부터 적폐청산에 이르는 격변의 시간을 곱씹고 있었다.‘일사부재리(一事不再理)’가 세계관의 축을 이루는 절차법의 대가에게 ‘과거 뒤집기’에 몰입된 사회는 큰 걱정거리인 듯 했다. 검찰이 무더기로 청구한 과거 재판들에 대한 재심도 그 중 하나였다.  
 
“과거 재판 결과를 재심으로 뒤집겠다는 시도에는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합니다. 군사정부 시절의 재판이라고 전부 공포정치나 군사독재의 부산물쯤으로 여겨선 곤란해요. 그 시절에도 검찰이 기소한다고 다 받아주진 않았어요. 전체적으로 보면 김신조 사건 등 북한에 의한 안보위협이 끊이지 않는 상황에서 자유민주적 기본질서를 지키기 위해 방어메커니즘이 작용한 측면이 분명히 있거든요. 서양의 재판이라고 100% 정의가 구현되겠습니까. 오판이라는 게 있지요. 짧은 인생 송사에 매달릴 수 없으니까, 소송을 대물릴 수 없으니까 3심으로 끝내는 겁니다. ”
이시윤 전 헌법재판관ㆍ감사원장 [YTN캡처]

이시윤 전 헌법재판관ㆍ감사원장 [YTN캡처]

이 전 재판관을 지난달 27일과 지난 5일 두 차례 만난 것은 지난 3월 10일 헌법재판소가 사상 처음 대통령 탄핵을 결정한 직후 YTN 화면에 잡힌 한 장면 때문이었다. 자막에는 헌재 앞을 지나는 행인처럼 ‘부암동 주민’이라고만 소개된 한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법치국가 국민으로서 결정엔 모든 국민이 승복해야 한다”고 말했다. 네티즌들이 ‘부암동 주민 이시윤씨’가 이 전 재판관임을 알리면서 그의 발언이 화제가 됐다. 이에 앞서 2월9일자 조선일보 1면에 ‘탄핵심판에 관한 법조인의 의견’이라는 제목의 광고를 낸 법조계 원로 9명 중 한 명으로 이름을 올려 촛불진영의 비난을 받기도 했던 그였기에 이날 '승복' 주문은 특별했다.   

조선일보 2월 9일자 하단에 실린 법조계 원로 9인의 광고. '탄핵반대' 광고 논란이 일었지만 대부분의 내용은 '절차'에 관한 것이다.

 
탄핵 직후에 ‘승복’을 강조한 것도 일사부재리 때문입니까.
“그게 법치주의이기 때문이죠. 헌법재판은 단심제여서 초심인 동시에 종심이라는 특징이 있어요. 패소한 사람의 심적 고통은 엄청날 수밖에 없습니다. 재판 결과에 반발할 수 있지만 법치주의를 위해 결과에 승복해야 합니다. 불복하고 재판의 무효를 주장하는 것은 법치주의를 부정하는 것입니다.”  
 
탄핵사유가 안 된다는 생각에서 광고에 동참하셨나요.
“절차법 전문가로서 ‘국정 농단’이라는 내용에 대해선 언급하고 싶지 않습니다. 다만 절차 진행은 많이 아쉬워요. 광고에서도 주로 절차에 대한 문제를 제기한 것입니다. 법정심리 기간이 180일인데 80여 일에 끝났습니다. 재판관 키를 넘는다는 기록을 검토하기에도 부족한 시간이어서 심리미진 우려가 있었죠. 탄핵은 단순히 정권 교체의 문제가 아니라 동북아 4강의 역학관계에 영향을 미치는 역사적 사건인데 준용해야 하는 형사소송 절차와 증거법칙이 도외시된 건 문제였습니다.
 
이 전 재판관은 탄핵심판 도중 재판정에 열 차례 나가 지켜봤다. 절차에 대해선 짚을 게 많다는 듯 그는 자신의 책 『신민사소송법』을 펼치며 ‘증명권’에 대한 설명을 했다.   
 
“형사재판이 아니라 징계절차라지만 행정부의 징계처분이 아니라 헌재의 재판 아닙니까. ‘이미 심증이 다 섰는데 이런 시시콜콜한 걸 내미느냐’고 할 게 아니라 당사자의 웬만한 증명 시도는 다 들어주라는 게 ‘증명권’의 취지에요. 형사소송이나 탄핵심판에선 더 중요하지요. 게다가 탄핵심판은 단심 재판 아닌가요?”
 
'신속 심리'에도 명분이 있지 않았나요.
“국정공백 장기화 우려는 ‘80일’을 설명하지 못합니다. 대통령 권한대행이 있었고 외환위기나 전쟁상황이 아니지 않습니까. 브라질은 호제프 대통령을 탄핵하고 권한대행체제로 리우 올림픽을 치렀어요. 이정미 재판관 임기 내에 결정해야 한다는 것도 설득력이 없었죠. 이 재판관 후임을 제청할 대법원장이 유고 상태는 아니었지 않습니까. 특히 박 전 대통령의 최후진술권이 보장되지 못한 게 아쉬워요.”
 
박 전 대통령이 나오려면 나올 수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소추인 측에서 피고인 신문하듯 하겠다고 압박을 했지요. 아마 거기에 부담을 느끼지 않았나 싶습니다. 아마 박 전 대통령이 기각 결정을 낙관했던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최후진술권은 피청구인에 대한 신문과는 별개로 보장돼야 하는 권리인데 변호인단이 제대로 대응을 못했지요.”  
 
탄핵 심리를 지켜본 노학자의 냉정한 시선은 재판부만을 향하고 있지는 않았다.  
 
“절차법 연구에 평생을 매달려 온 학자로서 역사적 재판 현장을 지켜본다는 어쩌면 소중한 기회였죠. 심리기간 내내 소추인 측은 일사분란했지만 박 전 대통령 측의 18명은 지리멸렬했습니다. 적전분열(敵前分裂)이라고나 할까요. 그 또한 박 전 대통령의 숙명적 비극 아닌가 생각했습니다.”  
 
요청을 받았는데 왜 직접 나서지 않았나요.
“(요청을) 뒤늦게 받았죠. 지금 속한 법무법인 탈퇴절차를 밟는 데 10여 일이 걸리는데 이미 그 사이에  재판은 전광석화처럼 진행돼 주요 국면들이 지나가 버렸습니다. 관여할 새가 없었죠." 
 
노무현 전 대통령 탄핵심판 때 어떻게 관여하셨나요.
“노무현 전 대통령 때는 고교ㆍ대학 동기인 조순형 당시 민주당 대표의 부탁으로 소추인 측에 관여했습니다. 사법연수원 사제지간의 연을 생각해 법정에는 나서지 않고 서면 대리만 했습니다. 그때도 탄핵사유는 안 된다고 생각했어요.”
 
이 전 재판관은 “탄핵에 관한 더 깊은 이야기는 시간이 되면 글로 정리하겠다”고 했다. 그의 이야기는 헌재 설립 초창기의 에피소드, 여러 사람들에 대한 기억을 돌아 친정인 법원 걱정으로 끝을 맺었다.      
 
“소송 망국(亡國) 안 가려면 관료적 법관 체계 바꿔야”  
 
“소송 망국으로 가지 않으려면 대법관이 되지 않으면 법관으로서 미완성이라는 판사들의 의식구조가 바뀌어야 합니다. 판사라면 알파이자 오메가라고 생각해야죠. 고등부장제부터 없애야 합니다. 카스트제도 마냥 일반판사-고등부장-대법관을 신분적으로 구분해서는 재판의 다양성을 기대할 수 없어요. 대법관을 신성시하니까 하급심은 그냥 대법원 판례에 기계적으로 대입하고 당사자들은 그 신성한 대법관 재판을 받으려고 무조건 3심까지 가는 게 현실입니다. 미국은 물론 독일ㆍ일본에도 없는 일이죠. 이게 새 대법원장의 과제입니다. 판사 블랙리스트 진상조사를 또 한다는데…. 앞으로 리스트 같은 거 안 만드는 게 중요한 거 아닌가요?”
 
법원장ㆍ헌법재판관ㆍ감사원장ㆍ대학교수를 지낸 이 전 재판관은 “당사자들의 살아 있는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던 1심 재판장 때가 가장 보람있었던 시절이다”며 “후배들도 그걸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이시윤 전 헌법재판관은 누구
1958년 10회 고등고시 사법과에 합격했다. 잠시 대학강사 생활을 거쳐 1962년부터 판사 생활을 시작해 수원지방법원장 시절인 1988년 이일규 대법원장의 제청으로 초대 헌법재판관에 임명됐다. 1993년 12월 국무총리로 자리를 옮긴 이회창 전 의원의 뒤를 이어 김영삼 정부의 두번째 감사원장(제16대)을 지냈다. 감사원장 퇴임 뒤엔 교직과 변호사 현업을 오가며 활동했다. 지금은 법무법인 대륙아주의 고문변호사로 재직중이다.  
 
판사 시절 집회ㆍ시위 과정에서 붙잡혀 기소된 시국사범들에게 무죄를 선고하는 등 소신 판결로 주목을 받던 그는 헌법재판관 시절 국제그룹 해체 사건의 주심을 맡아 위헌 결정을 이끌었고, 국가보안법 7조1항 ‘한정합헌’ 결정으로 국가보안법 남용에 제동을 걸었다. ‘검찰의 자의적 불기소 처분은 범죄 피해자의 재판 절차 진술권을 침해한다’는 이론을 개발해 헌재가 검찰권에 대한 헌법적 통제에 나설 수 있게 했다. 불기소 처분에 대한 헌법소원은 불안정했던 초기 헌재의 존재 기반을 마련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1993년 7월 헌법재판소 이시윤 재판관(右)이 전두환 정부의 국제그룹 해체는 위헌이라는 내용의 결정문을 낭독하고 있다. [중앙포토]

1993년 7월 헌법재판소 이시윤 재판관(右)이 전두환 정부의 국제그룹 해체는 위헌이라는 내용의 결정문을 낭독하고 있다. [중앙포토]

임장혁 기자ㆍ변호사 im.janghyuk@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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