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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중의 전쟁터 서태평양에서 파도 타는 두테르테

중앙일보 2017.11.02 11:49
 
 

다음주 아세안정상회의 주재 동남아의 스트롱맨
'포스트 미국' 대비한 헤징 외교, 일단은 성공
미국 동맹 유지하며 중·일·러와는 경제챙기기
분단국이자 북핵 위협 한국이 취하기엔 무리
국제질서 흐름 냉철히 읽어내는 전략세워야

 
 
지난달 19일 필리핀 마닐라의 콘래드 호텔. 동남아국가연합(ASEAN·아세안)창설 50주년을 기념하는 고위인사 포럼 연단에 13차 아세안 정상회의(10~14일) 의장국인 필리핀의 로드리고 두테르테 대통령이 올라섰다. 두테르테는 지난해 6월 취임한 이후 ‘마약과의 전쟁’을 벌이며 즉결처분으로 수천명을 사살하고, 버락 오바마 미 대통령이 이를 비판하자 ‘창녀의 자식’(son of a whore)이라 불러 국제사회에 충격을 안긴 인물이다. 유럽연합(EU)에 대해선 위선자라며 가운데 손가락을 세워 보이기도 했다.  
 
흰 셔츠 차림으로 350여 명의 외교관과 학자, 언론인 앞에 선 그는 외신으로 전해진 터프한 이미지와는 멀어 보였다. 느릿 느릿 무대로 걸어 간 72세 대통령의 표정은 천진스럽기까지 했다. 농담도 섞어가며 행사장 분위기를 편하게 만들었다. “중요한 자리라 준비된 (아세안과 관련된)원고를 읽겠다”고 운을 떼놓고는, 바로 EU 등에 대한 비판으로 들어갔다. “그들이 얘기하는 문명화된 방법으로 (마약)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면 와라. 환영한다”고 했다. 원고 없이 10분간 이어진 즉흥 연설이었다. 그 뒤 “이제 읽겠다”고 하고는 아세안의 평화와 통합을 강조했다.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앞줄 가운데) 이 10월 19일 마닐라 콘래드 호텔에서 열린 아세안 50주년 고위인사포럼에 참석, 글로리아 전 필리핀 대통령, 아시핏 전 태국 총리 등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김수정 기자]

로드리고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앞줄 가운데) 이 10월 19일 마닐라 콘래드 호텔에서 열린 아세안 50주년 고위인사포럼에 참석, 글로리아 전 필리핀 대통령, 아시핏 전 태국 총리 등과 포즈를 취하고 있다. [사진 김수정 기자]

 
 
초법적 처형 비난에도 국내 지지 고공
마약 단속 경찰의 ‘사법외적 살인’을 규탄하는 시위 속에서도 두테르테에 대한 국내 지지율은 80%(7월엔 91%를 찍었다)를 넘는다. 행사장에서 만난 로스텀 보디스타 필리핀 국방대 교수는 “두테르테를 비판하는 사람들도 있지만 국민 열에 아홉은 대통령을 지지한다. 마약 중독자가 300만명인 사회에서 때론 강한 대통령이 필요하다. 외교 정책에 대한 지지도 한 몫한다”고 했다. 수년간 군사대치 상태로 까지 악화된 중국과의 관계가 두테르테의 친중 외교 정책으로 회복세에 들어선 것을 국민들이 평가한다는 것이다.  
 
아세안 50주년 고위인사 포럼이 끝난 뒤 사진 촬영에 응한 두테르테 대통령 . 동남아의 '스트롱맨' 이란 별명 답지 않게 목소리, 표정은 부드러웠다.

아세안 50주년 고위인사 포럼이 끝난 뒤 사진 촬영에 응한 두테르테 대통령 . 동남아의 '스트롱맨' 이란 별명 답지 않게 목소리, 표정은 부드러웠다.

 
국제사회가 주목하는 건 그의 괴퍅한 대외 언행과 함께 구사되는 바로 그 외교 정책이다. 두테르테의 지난 1년은 최강 파워 미국과 중국이 부딪치는 서태평양에서 자유롭게(또는 아슬하게) 파도타기를 했다는 게 적절한 표현일 것 같다. 탈미친중이라는 큰 흐름속에 미·중을 상대로 현안 마다 말(馬)을 바꿔탔다. 그러면서도 미국과의 동맹은 유지하고 중국을 중심으로 러시아 일본,인도와의 관계를 강화해왔다. 헤징(hedging·이익을 위해 하나에 과도하게 의존하지 않고 분산)외교, 줄타기 외교라는 평가 속에, 두테르테가 정부내 핵심 인사들과는 ‘포스트 미국(Post America)시대를 대비하는 차원’이라고 했다는 얘기도 있다.  
 
필리핀은 16세기 이후 300년 간 스페인의 식민 통치를 받았다. 1898년 미국이 스페인 함대를 마닐라만에서 물리친 이후 미국의 통치 아래 들어갔고 2차대전 때인 1941년~44년 일본에 점령됐다가 1946년 독립할 때 까지는 미국의 통치를 다시 받았다. 이후 군사·경제적 파트너 관계가 된 미국은 필리핀의 이슬람 및 공산세력 반군을 진입하는 데 도움을 준 강력한 동맹으로 존재했다. 이처럼 한 세기 지속된 미국 중심의 국가 외교 정책 방향을 두테르테가 튼 것이다.  
 
지난 5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필리핀 양국 정상회담에 앞서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이 로드리고 두테르테(왼쪽) 필리핀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AP=베이징]

지난 5월 베이징 인민대회당에서 열린 중국 필리핀 양국 정상회담에 앞서 시진핑(오른쪽) 중국 국가주석이 로드리고 두테르테(왼쪽) 필리핀 대통령과 악수하고 있다. [AP=베이징]

 
12·13일 아세안회의서 트럼프와 첫 대면  
 취임 이후 20여개 나라를 방문하는 등 역대 필리핀 대통령 가운데 가장 왕성한 정상 외교를 한 두테르테 대통령은 워싱턴은 찾지 않았다. 워싱턴은 전임자들의 예외없는 취임 후 첫 방문지였다.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4월 전화 통화에서 백악관으로 초청했을 때 확답을 주지도 않았다. 대신, 베이징을 두 차례 찾았고, 모스크바는 필리핀 대통령으로는 처음 국빈자격으로 방문했다. 중국 시진핑 주석에겐 “이데올리기적 흐름에 합류하고 싶다”, 러시아 푸틴 대통령에겐 “내가 좋아하는 영웅”이라 불렀다. 지난달 30~31일엔 일본을 방문했다. 지난해10월에 이은 두번째 방문이다. 두테르테는 방일 뒤 "일본은 형제보다 더 가까운 친구, 지금이 양국 전략적 동반자 관계의 황금기"라고 했다.  
두테르테 대통령은 오는 12~13일 사이 ‘아세안과 미국’회의 참석차 마닐라를 방문하는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첫 정상 회담을 갖는다. 필리핀의 오피니언 리더들은 필리핀 현대사에서 취임 후 가장 늦게 미국 정상을 만나는 두테르테에게 준비를 잘해 안정적인 회담을 해 줄 것을 주문하고 있다. 미 정부 고위관계자도 “양국 관계가 여전히 굳건하다”며 “트럼프 대통령이 솔직하고 우호적인 대화를 할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달 30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악수를 나누는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 두테르테 대통령은 "일본은 형제보다 더 가까운 친구"라고 말했다. 일본은 필리핀에 5년간 1조엔(9조9000억원)을 지원하겠다는 지난 1월의 계획을 재확인했다.                      [사진 연합뉴스]

지난달 30일 도쿄 총리관저에서 악수를 나누는 두테르테 필리핀 대통령과 아베 일본 총리. 두테르테 대통령은 "일본은 형제보다 더 가까운 친구"라고 말했다. 일본은 필리핀에 5년간 1조엔(9조9000억원)을 지원하겠다는 지난 1월의 계획을 재확인했다. [사진 연합뉴스]

 
미국과의 합동 훈련을 축소하고 미 군함의 남중국해 자유항행작전을 위한 기지 사용을 불허하기도 한 두테르테는 특히 중국의 남중국해 영토 공세에 관대했다. 지난해 7월 헤이그 국제상설중재재판소가 중국의 ‘9단선’(남중국해에 그은 U자 형태의 선으로, 이 일대 바다의 90% 차지)이 법적 근거가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미국, 호주 등 서방이 “국제법 준수”를 강조하며 환영 입장을 냈지만 정작 중국을 제소한 필리핀은 언급을 자제했다. 필리핀 대륙붕 수역에서 중국이 군사훈련을 했을 때도 “내가 사전에 허용했다”고 감싸 논란을 빚었다. “중국과 전쟁을 해서 이길 힘이 없다. 지금은 때가 아니다”는 게 그의 주장이다. 
 
리처드 헤이다리안 교수(필리핀 드라 살레 대학)는 “하지만 중국의 팽창에 의구심을 갖는 필리핀 군부와 의회, 오피니언 리더들이 두테르테의 정책에 제동을 걸고 있다”(포린 어페어즈 4월)고 했다. 필리핀의 군 장성은 거의가 미국 웨스트 포인트 출신이다. 조지프 에스트라다 대통령을 막후에서 축출할 정도로 파워가 막강하다. 군부의 입김이든, 자신의 의지에 따른 것이든 두테르테는 미국과의 군사 동맹 기본 틀은 유지하고 협력하며 선을 넘지 않고 있다.      
 
두테르테의 외교는 외견상 현재까지는 성공적이다. 두테르테가 거리를 둔 미국도, 다가선 중국과 일본, 러시아도 필리핀에 경제·군사적 지원을 하며 껴안고 있다. 서방으로선 마약과의 전쟁으로 인한 인권 유린(경철 발표로만 3850명 사망)보다 두테르테가 벌이는 있는 이슬람국가(IS)연계 테러조직 소탕전이 더 중요하다는 측면도 있다. 마약과의 유혈전쟁에서 벌어지는 ‘인권 유린’을 비난하는 각국의 목소리가 줄어드는 이유다. 필리핀은 미국과 중국, 호주 등의 군사 지원 아래 말라위를 장악한 이슬람 극단주의 마우트 그룹을 완전 소탕했다. 중국과 일본은 말라위를 비롯한 민다나오섬 재건에 필요한 경제 지원도 약속했다. 두테르테가 대규모 수행단을 이끌고 해외 순방에 나서 약속 받은 투자 및 지원금은 수천억 달러다. 중국은 지난해 10월 1240억달러 경제 지원을 약속했고, 아베 일본 총리는 두테르테 대통령에게 1조엔(약 9조9000억원)규모의 지원 계획을 재확인하고, 양국 기업간 6조7000억 규모의 투자도 추진한다고 밝혔다.


 
김한권 국립외교원 교수는 “미국도 필리핀의 지정학적, 전략적 가치 때문에 등을 돌리기 보다는 동맹의 틀을 깨지 않으면서 최소한의 협력 관계를 유지하려 하고 있고 일본 역시 이런 미국의 입장에 동조하고 있다”고 말했다. 일본의 경우 동남아지역에서 미국의 공백을 메우고 중국을 견제하는 차원에서도 아세안에 대대적인 물량투입 외교를 펼치고 있다. 아베는 지난 1월 두테르테의 고향인 다바오시를 외국 정상으로는 처음 방문했다.
 
두테르테의 ‘헤징 외교’가 우리의 외교 정책에 던지는 시사점은 뭘까. 한국 역시 국제 질서의 변화를 전략적 사고로 면밀히 읽고 대비해야 한다는 당위는 기본이고, 주변 4강에 몰입된 우리 외교의 폭을 아세안 등으로 다변화해야 한다는 점도 제기된다. 하지만 미·중간 줄타기 외교는 필리핀과 한국이 처한 환경이 기본적으로 다르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지적이다. 필리핀은 우선 미국과의 동맹 성립 과정과 배경이 한국과는 다르다. 분단국도 아니고, 북한 핵의 위협을 받는 상황도 아니다. 김한권 교수는 “필리핀처럼 말을 갈아타는 전략은 안된다”며 “한미동맹을 근간으로 미·중과의 조율로 협상의 공간을 확도해 북핵을 해결하고 통일의 기반을 쌓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말했다.
 
김수정 외교안보선임기자 kim.sujeong@joongang.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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